1894년 7월 9일, 愚軒 金養鎭이 여러 근황과 세상 소식을 전하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1894년(고종 31) 7월 9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여러 근황과 세상 소식을 전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중석은 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 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은 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인편이 있었으나 이중석이 편지를 하지 않은 것은 혹 잊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빠트린 것인지 묻고, 險歲의 편지는 한 글자가 매우 값진 것인데 이중석이 편지를 해 주지 않은 데 대해 마음이 매우 섭섭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와서 알려 준 말을 듣고서 査夫人이 평안하고 服中에 있는 이중석도 연이어 건승함을 알았다고 하였다. 또 緬禮 날짜가 머지않아 改殮 등의 일을 차례로 거행하니 슬픈 마음이 배로 간절할 줄로 생각된다고 하고, 財力이 부족한데 모든 일을 어떻게 추진하겠느냐고 물었다. 慶이 남매는 無病하다고 들었으나 그 어미의 상황은 묵묵히 마음속으로 알 만하겠다고 하면서 걱정과 그리움이 간절하다고 하였다.
김양진 자신은 병세가 예전과 같은데 집안의 葬禮를 치를 대책이 전무하고 시국의 어지러움이 이와 같으니 죽은 그는 도리어 편안해도 늙어서 죽지 않은 자신은 어찌하겠느냐고 하였다. 가족들이 모두 暑症으로 하나도 건강한 사람이 없으니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蛇谷의 묏자리와 관련한 시비는 비록 그쳤으나 장삿날이 아직 멀었으니 그전에 사단이 생기지 않을지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가뭄이 점점 심해지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앞으로 接濟하는 것에 있어 비록 훌륭하게 대처하더라도 확실한 대책은 없을 것 같고,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 이 旱災를 이중석 쪽에서도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營門에 머물던 日本軍이 安東과 禮安으로 향했다가 근래 듣기로 곧바로 떠났다고 하니 비록 목전의 禍는 늦춰지게 되었으나 어찌 잠시 평안하다는 것을 福으로 여길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원근에서 혼례를 치른 사람들이 모두 대단히 간소하게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고, 慶이의 婚期는 상대편에서 혹 재촉하는 일은 없느냐고 물었다. 만약 재촉한다면 우리 쪽에서 退待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 보내는 손자는 이틀 밤을 묵는 데 지나지 않으니 이번에는 이중석을 방문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중석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이병순의 증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