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고종 29) 윤6월 28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여러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
1892년(고종 29) 윤6월 28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여러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中錫은 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은 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査夫人과 이중석, 慶이 어미, 여러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다. 이중석 딸의 婚禮가 순조롭게 거행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 뒤로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하면서, 신랑의 용모는 어떠하며 粧奩 등 모든 살림 도구는 어떠하냐고 물었다. 김양진 자신은 쇠약함이 날로 심해지는데 지난달에 法田의 사돈을 곡하러 갔다고 돌아오는 사이에 더위를 먹어 십여 일 동안 기력이 떨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며칠부터 비로소 의관을 정제하고 기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집안의 늙은 사람과 어린 사람들이 모두 暑泄을 앓아 서로 아프다고 한다고 하였다. 오직 어린 손자를 가르치는 일을 힘든 줄도 모르고 일상의 직업으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농사 작황은 오랫동안 한발이 들어 농작물들이 생기가 없다가 뒤늦은 큰비가 도리어 水災가 된 상황이라고 하면서 생계를 이어갈 대책이 막막함을 전하였고, 이중석 집안의 상황도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고 하면서 집 곁의 水田에 이앙은 할 수 있었냐고 물었다.
下溪 査兄의 환후는 근래 어떻다고 하는지 묻고, 시원한 날씨가 되면 한 번 만나러 움직일 계획이라고 하였다. 河回에서의 모임은 儒林의 더없이 중대한 일인데, 그 현장의 파란이 전에 없던 변고를 만들어 냈으니 이것이 무슨 事體냐고 하였다. 屛虎是非와 관련된 언급으로 보인다. 김양진 자신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 내버려두고 말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하였다.
이중석(1854~1912)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李秉淳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