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고종 28) 12월 8일에 金翼洛이 여러 근황을 전해 주고 묏자리를 정하는 일 및 婚事 등과 관련하여 부탁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
1891년(고종 28) 12월 8일에 金翼洛이 여러 근황을 전해 주고 묏자리를 정하는 일 및 婚事 등과 관련하여 부탁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翼洛은 본관이 義城으로, 愚軒 金養鎭의 아들이다. 李中錫은 李秉淳의 曾孫인데, 바로 金養鎭의 딸인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다. 따라서 金翼洛과 李中錫은 서로 처남매부지간이다.
먼저, 만나는 것은 바랄 수도 없는 것이지만 편지 또한 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인 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李中錫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안부편지를 주니 감사하고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인하여 그다지 춥지 않는 섣달 추위에 李中錫의 모친과 李中錫, 堂內 여러분들이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우러러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다만 누님이 여러 가지로 편치 못하다니, 걱정스런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慶이 남매가 무탈하니 다행스럽다고 하였으며, 배우기 시작할 때 싫증을 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문제점이라고 하면서 너무 拘檢하지는 말 것을 당부하였다. 金翼洛 자신은 6월 초에 우연히 肩脅의 痰痛에 걸렸고 脚部의 腫漸으로 인해 꼬박 5달 동안 병석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10월쯤에야 비로소 괜찮아졌다고 하였다. 자신의 부친께서 『聯芳世稿』를 校勘하여 印出하는 일로 陶淵書院에서 몇 달 동안이나 머무셨다가 일전에 비로소 돌아오셨는데 기력이 갑절이나 떨어졌다고 하였다. 또 어머니께서도 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매우 애가 탄다고 하였다. 다만 從兄 집안에서 于禮가 순조롭게 거행되었고 나머지 식구들도 모두 별탈이 없으며 손자도 똘똘하니, 위안이 되고 기쁘게 한다고 하였다. 이어 浙江에 묏자리를 정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한결같이 간절히 부탁하고 있으나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성의가 남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부끄럽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李中錫 측에서 川前에 넌지시 말을 해서 큰일을 敦定할 수 있게 해 준다면 刻骨難忘의 은혜일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婚處에 관한 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추신에서는, 10緡銅을 부쳐 보내니 男也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李中錫(1854~1912)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李秉淳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