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9월 27일, 柳川 李晩桂가 得男과 遠遊에 대해 축하하는 마음을 전하고 몇 가지 고향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1880년(고종 17) 9월 27일에 柳川 李晩桂(1845~1920)가 得男과 遠遊에 대해 축하하는 마음을 전하고 몇 가지 고향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가을 기운이 더욱 높아져서 李中錫을 그리는 마음이 정히 깊었는데 이러한 즈음에 李中錫의 편지가 갑자기 도착하니 매우 위안이 되고 감사했다고 하였다. 더구나 편지를 읽고서 객지에 있는 李中錫이 평안하고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令監[新巖 李晩耆]이 건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매우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시기 李晩耆가 楚山府使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 축하할 것은 李中錫이 아들을 본 경사가 있고 또 멀리 유람하고픈 소원을 이룬 것이라고 하면서, 금년에 李中錫이 거둔 소득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李中錫이 수천 리를 다닌 곳에 대해 비록 자세하게 알 수는 없어도 平壤은 번화하다는 명성을 독차지하고 있고 鴨綠江은 南北의 영역을 구분하니 모두 큰 구경거리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이는 젊은 시절에 남으로 江淮 지방을 두루 답사한 司馬遷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으며, 더구나 오랑캐 땅과 접하고 있으니 다른 언어와 다른 服制가 우습고 괴이한 것이 많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李中錫이 보고 들은 것을 모조리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훗날 돌아온 뒤에 자신에게 들려 달라고 하였다. 아마도 李中錫이 이 시기에 楚山府使로 있는 李晩耆를 찾아뵙고 그 일대를 유람한 일이 있는 듯하다. 李晩桂 자신은 예전처럼 지내고 있으나 어버이께서 항상 기력이 좋지 못하니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마음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애가 탄다고 하였다. 농사가 대흉년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였으며, 秋科에 각 村의 사람들이 일제히 응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本村의 경우 道仰과 羲元이 응시하니 몹시 부럽다고 하였다. 門中 내에서 初仕 자리를 얻고 大科에 급제한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서 몹시 장하다고 하였다. 宜仁 소식은 季氏의 편지에서 자세히 언급되어 있을 줄로 생각되므로 이 편지에서는 다시 번거롭게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끝으로 狗皮匣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李中錫(1854~1912)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李秉淳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