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6월 16일, 愚軒 金養鎭이 만삭인 딸을 잘 보살필 것을 당부하고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1879년(고종 16) 6월 16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만삭인 딸을 잘 보살필 것을 당부하고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중석은 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 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은 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阿休에서 만났던 것은 그저 얼굴만 보았을 따름이었고 그 뒤로 홍수를 겪어 소식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조석으로 매우 걱정이 되었다고 하였다. 전달 그믐쯤에 사람이 오기를 고대하였으나 끝내 조용했으니 雨水에 길이 막혔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였고, 이달 들어 날마다 사람을 보내 소식을 탐문하게 하리라 마음먹었으나 東溪의 많은 수량이 우려되어 그러지 못했다고 하였다. 요즘 큰비가 그치지 않고 더욱 무더워지는데 査夫人과 이중석 형제, 堂內 여러 사람들이 평안하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었다. 만삭의 딸에 대해 지극히 염려가 되지만 믿고 걱정하지 않는 것은 이중석이 틀림없이 잘 간호해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잉어를 구하려고 水尺들에게 널리 얘기해 두고 기필코 사서 보내주고 싶지만 연월로 큰비가 내리고 있다고 하면서, 잉어를 구하는 길은 낚시로는 어렵고 그물질을 해야 하니 마음은 먹어도 구할 수 없으니 매우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이어 현재 딸이 수척해지지 않고 식사도 평상시와 같은지 묻고, 무탈하게 순산할 수 있도록 십분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김양진 자신은 여름 들어 오랫동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황에 있고 형님께서 毒痁을 겪으셨으며 그 밖의 우환거리로 애를 태우고 있다고 하였다. 다만 鄭 서방과 權 甥이 와서 거의 몇 달을 머물며 날마다 그들에게 즐겁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마음을 약간 든든하게 하여 준다고 하였다. 楚山 소식을 근래 들었는지 물었는데, 이는 당시 楚山府使로 나가 있던 李晩耆의 소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만기는 1878년(고종 15) 5월 20일에 있었던 口傳政事에서 초산 부사로 낙점을 받아 임명되었다. 위로는 豐基와 順興, 아래로는 永川과 慶州에 이르기까지 沿江이 水災를 입었다고 하니 듣고서 매우 두려웠다고 하였다. 龍溪의 근황은 어떠하다고 하는지 묻고, 子翼에게 보내는 편지를 틀림없이 전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끝으로, 딸이 해산한 뒤에 사내를 낳았든지 딸을 낳았든지 간에 알려 달라고 하였다.
이중석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이병순의 증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