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1월 5일, 愚軒 金養鎭이 근황을 전하고 內行의 일정을 알려 주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1874년(고종 11) 1월 5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근황을 전하고 內行의 일정을 알려 주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중석은 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 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은 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禮法에 정해진 期限이 있어 이중석이 平服을 입게 되었으니 애통한 마음이 망극할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하물며 새해를 맞아 시절에 따라 感觸되는 마음을 더욱 진정시키지 못할 것인데 김양진 쪽의 劇憂가 계속되어 종을 보내 편지를 전하게 하지 못했으니 늘 悲戀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小星이 이중석의 편지를 가지고 이르니 뜯어보고 매우 기뻤고 더구나 査夫人과 이중석 형제, 堂內 여러분들이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더욱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중석의 부인이자 자신의 딸이 임신하여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있으니 그 고생스런 상황을 상상할 만하다고 하였으며, 허약한 체질에 임신한 딸이 어떻게 順産할 수 있을지 머리가 무겁다고 하였다.
김양진 자신은 새벽에 忌祭를 올리니 심사를 이루 형언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더구나 조카 健이가 이달 2일에 아들을 낳은 관계로 宗家에서 祭祀지내지 못하고 下宅에서 간소하게 지내고 통곡하여 애통한 마음을 쏟아내지 못하고 다만 눈물을 머금고 날을 보냈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겨울에 자신이 겪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무섭다고 하면서, 셋째 딸이 11월 열흘쯤부터 원인 모를 병이 점점 심각해지더니 보름 동안이나 손을 써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가 그믐께부터 조금 생기를 찾더니 요 며칠 사이 정신이 들기는 했으나 아직도 혼자 힘으로는 움직이거나 식사를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 모습은 皮骨만 있을 따름이라고 하면서, 어느 때에야 일어서고 걸을 수 있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지내는 통에 정신을 수습하지 못해 바깥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 禫祭를 치른 이중석에게 인사를 빠트렸다고 하면서, 이중석이 자신의 이러한 사고에 대해 모른다면 어찌 자신을 비정한 사람이라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중석의 從叔 令公이 서울에 들어갈 때 마침 아주 혼란한 조정의 상황을 만나게 되었으니 집에 있는 자신까지도 염려가 되나, 從叔이 세상 물정을 겪어 명철하기에 본래 대처할 도리가 있을 것이니 믿고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끝으로, 임신 9개월이라고 하는 자신의 딸을 이달 안으로 데려올 것인데 21일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직 길일을 뽑는 사람과 상의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확정한 다음 열흘쯤에 丹沙로 출발하는 次兒를 통해 일정을 알려 주겠다고 하였다.
이중석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이병순의 증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