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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김양진(金養鎭)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74.4717-20150630.0625257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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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양진, 이중석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74
형태사항 크기: 30.3 X 36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의인 진성이씨 의인파 은졸재고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4년 김양진(金養鎭) 서간(書簡)
1874년 1월 5일에 우헌(愚軒) 김양진(金養鎭)이 근황을 전하고 내행(內行)의 일정을 알려 주기 위해 이중석(李中錫)에게 보낸 편지이다. 처음 상대의 편지를 받고 상복을 벗게 된 상대와 상대 가족들의 안부를 알게 되어 위로된다고 하였다. 또한 상대의 아내인 임신한 딸이 허약한 체질에 순산(順産)할 수 있을지 걱정하였다. 자신의 근황으로 기제사를 종가에서 지내지 못한 상황, 셋째 딸의 병을 앓고 있는 상황 등을 알렸다. 이어서 관직생활을 하러 서울로 간 상대의 종숙(從叔)에 대한 걱정, 임신한 딸을 데려 올 계획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김동현

상세정보

1874년 1월 5일, 愚軒 金養鎭이 근황을 전하고 內行의 일정을 알려 주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1874년(고종 11) 1월 5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근황을 전하고 內行의 일정을 알려 주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중석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 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禮法에 정해진 期限이 있어 이중석이 平服을 입게 되었으니 애통한 마음이 망극할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하물며 새해를 맞아 시절에 따라 感觸되는 마음을 더욱 진정시키지 못할 것인데 김양진 쪽의 劇憂가 계속되어 종을 보내 편지를 전하게 하지 못했으니 늘 悲戀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小星이 이중석의 편지를 가지고 이르니 뜯어보고 매우 기뻤고 더구나 査夫人과 이중석 형제, 堂內 여러분들이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더욱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중석의 부인이자 자신의 딸이 임신하여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있으니 그 고생스런 상황을 상상할 만하다고 하였으며, 허약한 체질에 임신한 딸이 어떻게 順産할 수 있을지 머리가 무겁다고 하였다.
김양진 자신은 새벽에 忌祭를 올리니 심사를 이루 형언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더구나 조카 이가 이달 2일에 아들을 낳은 관계로 宗家에서 祭祀지내지 못하고 下宅에서 간소하게 지내고 통곡하여 애통한 마음을 쏟아내지 못하고 다만 눈물을 머금고 날을 보냈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겨울에 자신이 겪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무섭다고 하면서, 셋째 딸이 11월 열흘쯤부터 원인 모를 병이 점점 심각해지더니 보름 동안이나 손을 써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가 그믐께부터 조금 생기를 찾더니 요 며칠 사이 정신이 들기는 했으나 아직도 혼자 힘으로는 움직이거나 식사를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 모습은 皮骨만 있을 따름이라고 하면서, 어느 때에야 일어서고 걸을 수 있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지내는 통에 정신을 수습하지 못해 바깥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 禫祭를 치른 이중석에게 인사를 빠트렸다고 하면서, 이중석이 자신의 이러한 사고에 대해 모른다면 어찌 자신을 비정한 사람이라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중석의 從叔 令公이 서울에 들어갈 때 마침 아주 혼란한 조정의 상황을 만나게 되었으니 집에 있는 자신까지도 염려가 되나, 從叔이 세상 물정을 겪어 명철하기에 본래 대처할 도리가 있을 것이니 믿고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끝으로, 임신 9개월이라고 하는 자신의 딸을 이달 안으로 데려올 것인데 21일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직 길일을 뽑는 사람과 상의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확정한 다음 열흘쯤에 丹沙로 출발하는 次兒를 통해 일정을 알려 주겠다고 하였다.
이중석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이병순의 증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4년 김양진(金養鎭) 서간(書簡)

壻君 奉謝。
禮限矣。孝子之冠巾就吉。隕廓之慟。想
極天靡披。況値餞迓節。撫時感觸。尤無以
按住。緣此間劇憂澒洞。縱不能起一力替一紙。
居常悲戀不置。望外小星。帶書而至。披玩欣
瀉之餘。因審新正
太夫人體節。對時難老。侍餘魯衛湛穩。堂
內僉候俱休。何等奉慰。女阿漸至身重。其苦境
可想。弱馬重卜。曷以得利釋。頭重頭重。婦拙。曉哭
讐辰。情事無可言。加以侄擧男於今初二。奠
獻不得於宗寢。而略設於下宅。且未得放聲洩哀。
只含涕送日而已。冬間履歷。追思亦魂悸。第三女自
至月旬間。非軫非沴之症。轉轉添㞃。至於莫救者一望。
自晦間。稍得一條生脉。數日來始得省人事。而尙不能自起臥自手匙。
目今貌樣。惟皮骨而已。未知何時可得起立行步。愁悶愁悶。似此經度。心
神飛越。無暇念及於外事。所以於禫事時闕焉▣▣。君不知此地
事故。則寧不責
我以非情之人耶。
愧慮愧慮。從玩
令入城之時。適
會朝端風浪。
在家者亦所貢
慮。然涉世明哲。
自有一部道理。
惟是恃而無恐
耳。內行若
無此中憂故。
則欲於過禫後。
趁卽刷來矣。
事幾如是。不
必退說。今月
聞九朔云。斷當
以此月內定半率來。卄一日似好。而姑未與涓日者相
議。當於旬間。次兒丹沙之行。牢定奉告。以此諒之
爲望。餘。忙甚都閣。留竢續人。不具式。
甲戌 元月 初五日。婦拙 養鎭 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