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6월 9일, 愚軒 金養鎭이 緬禮와 관련하여 金 地師를 소개하고 그와 상의하라고 당부하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1873년(고종 10) 6월 9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緬禮와 관련하여 金 地師를 소개하고 그와 상의하라고 당부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중석은 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 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은 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달이 넘도록 서신이 없어 이중석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사람이 오고 이중석의 편지를 전해 주어 읽으니 마치 만나서 정담을 나누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더구나 근래 더운 날씨에 査夫人이 평안하시고 服中에 있는 이중석이 잘 버티고 있고 딸도 예전처럼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면서, 그 어떤 險歲의 소식이 이보다 좋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다만 마을에 번진 전염병 기운이 아직 종식되지 않아 깊이 염려스러우니, 퍼진 곳과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고 기간이 조금 오래되었다고 하여 방비를 늦추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김양진 자신은 집안의 화가 다하지 않아 갑자기 從婦를 잃어 累代 祭祀를 받들던 집안에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황량한 온 집안의 광경을 전하였다. 또 葬禮를 날씨가 서늘해지기를 기다려 할 수 없어 현재 地師를 불러 혈자리를 찾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중석의 從叔 令公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은 형세상 불가피한 것이지만 緬禮가 이 때문에 지체되고 있으니 이중석의 심경은 갈수록 뭐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從叔이 왔더라도 이러한 酷暑期에는 결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事勢를 보아 천천히 도모하라고 당부하였다. 風水地理의 禍福說은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子弟가 어버이를 葬禮 지낼 때 살피고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김양진 자신은 명당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어 근래 金 地師를 불렀는데 그의 心地와 術法이 몹시 淳厚하고 자못 高明하다고 하면서, 뒤에 緬禮를 추진할 때 미리 통보하여 그의 검토를 거쳐 묏자리를 잡은 다음 일을 도모하고 이전처럼 혼자 하다가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김양진 집안의 葬禮 때 金 地師가 꼭 와서 머물 것이니 이중석이 그때 만약 온다면 상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이중석이 보내 준 菸葉이 자신의 胃를 시원하게 해 줬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하였다.
이중석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이병순의 증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