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10월 24일, 裵克紹가 어버이 산소의 石床을 세웠는데 비면을 새기는 것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중용 장구 등에 의문 나는 점을 묻기 위해 崔孝述에게 보낸 편지
1866년 裵克紹가 어버이 산소의 石床을 세웠는데 비면을 새기는 것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중용 장구 등에 의문 나는 점을 묻기 위해 崔孝述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앞부분은 안부와 추위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물어보았다. 이어 자신의 근황을 전하였다. 근래 어버이 산소의 석상을 세웠는데 시속을 따라 비면을 새겨서 묘지나 묘표의 뜻을 대신하였으니, 이는 바로 考妣를 合墳한 곳을 표시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가로로 행간을 만들어서 上行에는 큰 글씨로 ‘處士某貫某公諱某之墓’라고 하였고, 下行에는 작은 글자모양으로 ‘孺人某貫某氏合祔’라고 쓰는 것이 어떠한지 물어보았다. 또한 妣位를 먼저 장사지내고 祔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도 무방한지, 혹은 마땅히 合封이나 合窆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또한 어떠한지 가르침을 달라고 하였다.
이어서 『中庸』 首章의 章句 ‘循其性’의 뜻에 관하여 물었는데, 已發의 용은 진실로 그 성을 따른 도이고, 未發의 체도 또한 그 성을 따른 도인데, 어찌 도의 체로써 홀로 그 성을 따른다고 이르지 않겠냐고 하면서 말로 정의를 내릴 때에 차이점이 나기 쉬우니, 다시 변별된 가르침을 달라고 하였다.
편지의 끝부분에는 위에서 말한 중용 구절이 陰陽五行이 理氣를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 당시에 질문하였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 돌아와 다시 추구해보아도 아직도 먼저 들었던 의혹을 풀지 못했다고 하였다. 氣는 음양오행의 기이고, 理는 또한 음양오행의 리이므로 그 아래 健順五常이라 한 것은 음양오행의 리로 성을 삼은 것이니, 상면에 이른바 음양오행이 어찌 리를 버리고 온전히 기를 말했다고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大學或問』에 이르기를, "천도가 유행해서 만물을 발육한다"라고 했으니 그 조화가 되게 하는 까닭은 음양오행일 뿐이고, 이른바 음양오행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 리가 있은 후에 이 기가 있다고 하였다. 또 "인물의 생은 반드시 이 리를 얻은 이후에 健順仁義禮智의 성을 삼을 수 있으며, 반드시 이 기를 얻은 이후에 魂魄五臟百骸의 몸을 삼을 수 있다"고 한 것을 들어서 이 리와 기는 음양오행의 리와 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자세히 답변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간찰의 수취인은 百弗庵 崔興遠의 손자인 최효술이다. 자는 穉善, 호는 止軒이다. 타고난 자질이 道에 가까웠는데 이에 더하여 性理에 대한 학문을 탐구하여 유림의 師表가 되었다. 外王考 鄭宗魯를 따라 수학하였다. 1860년에 遺逸로 천거되어 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865년에 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다. 나라에서 전후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문집 7책이 전한다. 발급인인 배극소(1819~1871)는 자가 乃休, 호는 默庵, 본관은 盆城이다. 부친은 裵相觀이다. 直齋 金翊東과 定齋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50년(철종 1) 증광시 생원 1등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출세에는 뜻이 없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855년(철종 6) 류치명이 智島로 유배를 당하자 그곳까지 따라가서 머물며 학문연마에 힘썼다. 저서로는 『默庵文集』 등이 있다.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