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4월 4일, 의성김씨의 金弼洛(1831~1907)이 옻골의 崔參奉에게 보내는 편지
1861년(철종 12) 4월 4일, 의성김씨의 金弼洛(1831~1907)이 옻골의 崔參奉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이다.
김필락은 先考 金鎭原의 상제가 끝나기도 전에 生父 金鎭基의 상제를 만나 매우 애통하였다. 최 참봉이 조문하였으나 아직까지 답장을 보내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다.
편지에는 김필락의 심정과 근황을 상세하게 적었다. 臨河로 이거하였으나 老母와의 거리가 멀고 빈소도 지킬 수 없어 장차 차례대로 모여 살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거처는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王考妣의 緬禮를 경영한지 오래되었으나, 일 없는 날에 겨를을 내지 못하여 이장할 장소를 물색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인하여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임시 매장한 것도 이미 일여 년이 지났으며 雨水 전에 일을 마무리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이장할 장소를 한군데도 찾지 못하여 통박한 심정이라고 하였다. 가련하고 고아 같은 사람이 몽매하여 중첩된 상사를 후회하지 않고 처리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끝 부분에는 先札의 유묵 수십 폭을 찾아내었는데 인편이 없어 부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베껴서 遺墨을 갈무리 해둘 뜻이 있는데, 혹시 걸어놓고 완상해도 괜찮을 지 물어보았다.
발급자 김필락의 본관은 義城, 자는 耆伯, 호는 陶隱이다. 鎭原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生父는 鎭基이다. 안동에 거주하였고, 저서로는 『陶隱集』이 전한다.
수취인은 최효술로 상정했는데, 그의 어머니 진양정씨가 1853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최효술의 본관은 慶州, 자는 穉善, 호는 止軒이다. 百弗庵 崔興遠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湜이며, 어머니는 晉州鄭氏로 立齋 鄭宗魯의 딸이다. 그는 외할아버지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0년에 遺逸로 천거되어 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865년에 敦寧府都正을 거쳐 副護軍에 이르렀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柳致明 · 李秉夏 · 李敦禹 · 이휘령 · 이원조 · 孫亮述 등 영남의 석학들과 학문적인 교유가 있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主理論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음양역리학에 대하여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지헌집』15권 7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