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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김필락(金弼洛)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61.4717-20150630.K2714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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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필락, 최효술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61
형태사항 크기: 39 X 34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1년 김필락(金弼洛) 서간(書簡)
1861년 4월 4일, 의성김씨의 김필락대구 옻골의 최 참봉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이다. 김필락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제가 끝나기도 전에 생부 김진기의 상제를 만나 매우 애통해 하였다. 최 참봉이 조문했으나 아직까지 답장을 보내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다. 아울러 근황도 알렸는데, 김필락임하로 이거했으나 노모와의 거리가 멀어 장차 모여 살 것이며, 조부모의 묘소를 이장할 장소를 찾지 못해 애타는 심정도 전하였다. 끝 부분에는 상대편 조상의 유묵을 베껴 걸어놓고 완상해도 괜찮은지 물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상세정보

1861년 4월 4일, 의성김씨의 金弼洛(1831~1907)이 옻골의 崔參奉에게 보내는 편지
1861년(철종 12) 4월 4일, 의성김씨의 金弼洛(1831~1907)이 옻골의 崔參奉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이다.
김필락은 先考 金鎭原의 상제가 끝나기도 전에 生父 金鎭基의 상제를 만나 매우 애통하였다. 최 참봉이 조문하였으나 아직까지 답장을 보내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다.
편지에는 김필락의 심정과 근황을 상세하게 적었다. 臨河로 이거하였으나 老母와의 거리가 멀고 빈소도 지킬 수 없어 장차 차례대로 모여 살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거처는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王考妣의 緬禮를 경영한지 오래되었으나, 일 없는 날에 겨를을 내지 못하여 이장할 장소를 물색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인하여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임시 매장한 것도 이미 일여 년이 지났으며 雨水 전에 일을 마무리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이장할 장소를 한군데도 찾지 못하여 통박한 심정이라고 하였다. 가련하고 고아 같은 사람이 몽매하여 중첩된 상사를 후회하지 않고 처리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끝 부분에는 先札의 유묵 수십 폭을 찾아내었는데 인편이 없어 부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베껴서 遺墨을 갈무리 해둘 뜻이 있는데, 혹시 걸어놓고 완상해도 괜찮을 지 물어보았다.
발급자 김필락의 본관은 義城, 자는 耆伯, 호는 陶隱이다. 鎭原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生父는 鎭基이다. 안동에 거주하였고, 저서로는 『陶隱集』이 전한다.
수취인은 최효술로 상정했는데, 그의 어머니 진양정씨1853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최효술의 본관은 慶州, 자는 穉善, 호는 止軒이다. 百弗庵 崔興遠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이며, 어머니는 晉州鄭氏로 立齋 鄭宗魯의 딸이다. 그는 외할아버지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0년에 遺逸로 천거되어 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865년에 敦寧府都正을 거쳐 副護軍에 이르렀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柳致明 · 李秉夏 · 李敦禹 · 이휘령 · 이원조 · 孫亮述 등 영남의 석학들과 학문적인 교유가 있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主理論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음양역리학에 대하여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지헌집』15권 7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61년 김필락(金弼洛) 서간(書簡)

崔參奉。座前。
答狀上。省式謹封。
省式白。弼洛何辜于天。先人喪制未闋。又遭本生先考喪。未幾月一弟抱疴者。又從而
寃逝。天乎天乎。此何變也。此何理也。一縷殘喘何獨不絶。旣過襄禮。又過小祥。天下萬古。豈有
如許頑忍人也。卽蒙
尊慈俯垂慰問。俛仰疇昔。倍切哀感。但遠外便因巧違。未能趁修答儀。南來節宣。又無以
時承。伏悚且蔚。不審淸和。
頣養鼎席候。速幸康泰否。寢郞恩敎。自是朝野公議。慰賀何等。而二難叔主。想。
承煥增慶矣。區區慰祝不任下誠。戚從孫心制人。怯於幸海。畢竟不安厥居。以圖命所迫。移寓於
臨河。去秋月隔二岑而新接。辛酸無暇言。人理之極處。至於老慈而相離。殯宇而不守。將次第團
聚。而姑未搆屋。且申王考妣緬禮。榮之蓋久。而未遑於無事之日。椊當近來境界。不得無動心者。
不卜地而出柩安坎。已過冬春矣。親山權奉。亦又過朞。勢當極圖於雨水前。而迄無一處占穴。 痛迫
情事如何盡達。哀此單孑之身。蒙昧之見。何以能料理。大事之重疊。勿之有悔也。
先札搜得屢十幅。而苦無的便。未付如得小暇謄止。則可藏遺墨。而
恐無玩揭之責耶。餘惟祝
氣候康寧。以副遠忔。不備。伏惟 
下鑑。答狀上。
辛酉 四月 初四日。戚從孫心制人 金弼洛 答狀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