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5월 9일 鄭倫休가 刊行事에 대해 사람을 보내 살펴보았는데 판목 중 상태가 좋지 않아 쓸 수 없는 것이 백 판이 넘고 나머지도 보장할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 崔峕敎에게 보낸 편지
1853년 5월 9일 鄭倫休가 刊行事에 대해 사람을 보내 살펴보았는데 판목 중 상태가 좋지 않아 쓸 수 없는 것이 백 판이 넘고 나머지도 보장할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 崔峕敎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방이 보내온 편지를 통해 더위가 시작하는 이때에 慈闈의 건강이 평안을 잃은 것을 위로하였다. 높은 나이에 으레 있는 병이므로 오래지 않아 평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맏며느리의 병이 다섯 달 계속되며 극도의 지경으로 가고 있는 상태에 또한 산달이 닥쳐 밤낮으로 줄곧 서서 지내는 상황을 전했다.
상대방이 말한 일에 대해 전하기를, 어제 仲弟를 梅堂에 보내 刊板의 일을 살펴보게 했는데, 원래 썩고 갈라지고 폭이 짧아 쓸 수 없는 것으로 104판을 따로 빼두었는데 하나하나 살펴봄에 겨우 쓸 수 있는 것이 단지 수십 판이었다는 사실을 전하며 이 수십 판 또한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刻手가 전하는 말은 다만 그 남은 것이 얼마인지만 알고 그 재목이 쓸 만한 것인지 쓰지 못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며 불안한 상황을 전했다.
발신인인 정윤휴는 본이 烏川이다. 수신인인 최시교(1844~1918)는 본은 慶州이며, 字는 子順, 號 漆滸이다. 백불암 최흥원의 5대손으로 대구 漆溪(옻골)에 거주하였다.
1월 21일, 아들 崔周鎭(1724~1763)이 아버지 崔興遠(1705∼1786)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를 받아서 할머니와 아버지께서 병이 심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걱정이 된다고 하고 있다. 이어서 여러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외지에 지내고 있는 자신과 여러 족숙들의 상황을 알리고 있다. 편지의 내용 중에 승려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최주진은 절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기는 먹는 일을 간소히 하여 하여 승려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있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끝으로 문희(文喜)의 혼례 준비가 잘 되고 있는 지를 물으며 편지를 마치고 있다. 추록에는 자신이 지내는 곳에 삼이 적어서 집에서 부탁한 미투리를 짜서 보내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이어서 사교(沙橋)의 행차가 오늘 있다고 하는데 그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고 종숙께서 오산(吳山)의 행차에서 돌아오셨다고 하니 혹시 들은 일이 있으신지 묻고 있다. 또한 이곳에 한 중이 몸이 안 좋아서 우선 막으로 내보냈는데 혹시 유행병이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하고 있다.
발급자 최주진는 자는 공보(公普), 호는 동계(東溪)이고 양진당(養眞堂) 류영(柳泳)의 딸과 결혼하였다. 대산(大山) 이상정(李相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종덕(金宗德) ‧ 김강한(金江漢) ‧ 이종수(李宗洙) ‧ 정충필(鄭忠弼) ‧ 이천경(李天慶) 등 과 교유하였다. 선조였던 대암(臺巖) 최진중(崔鎭仲)의 ‘용연정’을 중수한 뒤 그곳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수취자 최흥원은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 이다. 대구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최수학(崔壽學)이고, 아버지는 최석정(崔錫鼎)이며, 어머니는 진사 조화(趙崈)의 딸이다. 1782년 장악원주부·공조좌랑을 거쳐 1784년 세자익위사좌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대대로 달성의 칠계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이 편지는 외지에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집안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등 과거 양반 가문의 가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한 중이 병에 걸려서 막으로 내보내는 모습을 통해 과거 전염병에 대처하는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1차 작성자 :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