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2월 5일, 金驪洛이 말과 종, 품삯을 구하는 일로 漆溪에 보낸 편지
1853년 2월 5일 金驪洛(1809~1863)이 말과 종, 품삯을 구하는 일로 漆溪에 보낸 편지이다.
수취인과 헤어진 뒤 몹시 그리워하던 차에 서간을 받고 정이 깃든 물건을 부친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이어서 역질이 창궐하여 수취인의 건강이 매우 염려스럽고, 자신도 역질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또 先先生의 문집간행을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斯文에 큰 다행이라고 하였다. 한편, 말과 종을 빌리는 품삯을 구하기 어려우니, 구하지 못하면 귀중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달라는 답장에 잘 헤아려 달라고 하였다. 끝으로 바빠서 춘부장 어른에게 보낼 안부편지를 빠트려 죄송하다고 했고, 또 보내온 물품은 매우 정성스러운데, 자신은 보답할 물건이 없어서 잣[栢子]을 보내니 부끄럽다고 하였다.
발급인인 김여락의 본관은 義城, 자는 應一, 호는 花西이며, 스승은 定齋 柳致明이다. 자질이 총명하여 어린 나이에도 글 뜻을 이해하였다. 날마다 부모님을 모셨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싫어하였다. 학문을 부지런히 연마했으나, 대과를 보지 않았다. 일찍이『태극도설』을 가지고 정재 류치명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1858년 많은 명승지를 유람하고, 또 鳳停寺에서『근사록집해』를 첨삭하였다. 1863년 2월 8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였다.
피봉에 ‘漆溪 重侍座下史’라고 적혀 있으니, 수취인은 대구 옻골에 있는 경주최씨 집안으로 보이고, ‘重侍’를 쓴 것으로 보아 조부모대가 살아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에 경주최씨 족보를 살펴보면, 편지를 쓴 癸丑年 2월 崔命德(1822~1867)의 조부인 崔湜(1762~1807)은 작고하였으나 조모인 晉陽鄭氏가 편지를 작성한 시기에 살아있었으므로, 수취인은 최명덕으로 추정된다. 최명덕의 본관은 慶州, 자는 敬立, 호는 愛日齋이다. 百弗庵 崔興遠의 현손이다. 품계는 通德郞이다.
1차 작성자 : 김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