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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김여락(金驪洛)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53.4717-20150630.K27140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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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여락, 최명덕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작성시기 1853
형태사항 크기: 30 X 34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53년 김여락(金驪洛) 서간(書簡)
1853년 2월 5일 김여락칠계에 보낸 편지이다. 역질이 창궐하는 상황에 당신의 건강이 매우 염려되는 한편, 자신도 역질로 두렵다고 했고, 또 선 선생의 문집간행은 사문의 큰 다행이라고 하였다. 말과 종을 빌리는 품삯을 구하기 어려우니, 구하지 못하면 귀중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보낸 물품은 매우 정성스러운데, 자신은 잣을 보내어 부끄럽다고 하였다.
1차 작성자 : 김효심

상세정보

1853년 2월 5일, 金驪洛이 말과 종, 품삯을 구하는 일로 漆溪에 보낸 편지
1853년 2월 5일 金驪洛(1809~1863)이 말과 종, 품삯을 구하는 일로 漆溪에 보낸 편지이다.
수취인과 헤어진 뒤 몹시 그리워하던 차에 서간을 받고 정이 깃든 물건을 부친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이어서 역질이 창궐하여 수취인의 건강이 매우 염려스럽고, 자신도 역질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또 先先生의 문집간행을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斯文에 큰 다행이라고 하였다. 한편, 말과 종을 빌리는 품삯을 구하기 어려우니, 구하지 못하면 귀중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달라는 답장에 잘 헤아려 달라고 하였다. 끝으로 바빠서 춘부장 어른에게 보낼 안부편지를 빠트려 죄송하다고 했고, 또 보내온 물품은 매우 정성스러운데, 자신은 보답할 물건이 없어서 잣[栢子]을 보내니 부끄럽다고 하였다.
발급인인 김여락의 본관은 義城, 자는 應一, 호는 花西이며, 스승은 定齋 柳致明이다. 자질이 총명하여 어린 나이에도 글 뜻을 이해하였다. 날마다 부모님을 모셨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싫어하였다. 학문을 부지런히 연마했으나, 대과를 보지 않았다. 일찍이『태극도설』을 가지고 정재 류치명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1858년 많은 명승지를 유람하고, 또 鳳停寺에서『근사록집해』를 첨삭하였다. 1863년 2월 8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였다.
피봉에 ‘漆溪 重侍座下史’라고 적혀 있으니, 수취인은 대구 옻골에 있는 경주최씨 집안으로 보이고, ‘重侍’를 쓴 것으로 보아 조부모대가 살아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에 경주최씨 족보를 살펴보면, 편지를 쓴 癸丑年 2월 崔命德(1822~1867)의 조부인 崔湜(1762~1807)은 작고하였으나 조모인 晉陽鄭氏가 편지를 작성한 시기에 살아있었으므로, 수취인은 최명덕으로 추정된다. 최명덕의 본관은 慶州, 자는 敬立, 호는 愛日齋이다. 百弗庵 崔興遠의 현손이다. 품계는 通德郞이다.
1차 작성자 : 김효심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53년 김여락(金驪洛) 서간(書簡)

春坡 戚末 謝書。
漆溪 重侍座下史。謹封。
平日一識之願。因出弔。幸而目其貌。耳其聲。乃知高
陽宅裡。嘉穀有種。但其家坐稠。未得穩討而別。別
懷尙若物之在瞻。不虞
惠問遠投樵社。講以契誼。付以情物。渠何以得此於
下史也。感愧交幷。罔知爲謝。恭審
重堂體力。萬慰無損。省餘棣履履用湛勝。何
等慰賀。而但沴戒。恐是運氣所使。還切慮仰。戚末。
昆季或相不健。蓋無好箇悰況。而輪沴四熾。危怖
度日。奈何。
先先生繡榟之役。知似從速始手。斯文之幸。極矣。月初相
對之時。尊使謂以春晩。所以歸後。趁未得探知。似有
伊間一面。方苦企矣。卽承來喩。不覺憮然。使
貴星直送鄙族。所在處以書勤托。則其答曰。
騎率貰 。亦難得。今望間若不自
此辦去。則望後。自貴中起送人馬
云云。此言似無怪矣。以此
盛諒處之。如何如何。
春府丈前忙闕候儀。
悚怪悚怪。惠物。何其勤
厚至此也。無物仰報。
只以栢子幷汗呈。尤
愧尤愧。餘何當更握。臨紙
增悵。不宣謝禮。
癸丑 二月 初五日。戚末 金驪洛 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