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7월 26일, 金養巽이 崔孝述의 부음을 듣고 조문하지 못해 죄송스럽다는 인사와 함께 영결식에 참석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
1853년(철종4) 7월 26일에 金養巽(1788~1864)이 崔孝述(1786~1870)의 부음을 듣고 조문하지 못해 죄송스럽다는 인사와 함께 영결식에 참석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김양손은 부음을 듣고 마땅히 허겁지겁 달려가야 했지만 불볕 더위와 다리가 아파서 가지 못해 통곡스러워 했으며,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한 듯하여 애통하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최효술에게 상중의 건강은 상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최효술은 70의 나이에 어머니 진양정씨의 상을 당하였다. 이미 근력이 약해져 있는데 부모상으로 너무 슬퍼한 나머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이는 옛 사람이 경계하는 바이니, 잘 헤아려 달라고 하였다.
더위로 몸이 많이 상했으며, 타고 갈 것도 마땅하지 않아 장례 때에도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날씨가 서늘해지면 한 번 갈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조문할 수 없지만 장례를 잘 치루어 김양손의 바람에 부응해 달라고 하였다. 추록에는 명태 15마리를 보낸다고 하였다.
발급인 김양손의 본관은 안동이며, 苟齋 金宗敬(천사 김종덕의 아우)의 종손자이다. 의성에 거주한 김종경은 20세에 大山 李相靖의 문인이 되어 약 10년 간 안동 소호리에 머물면서 학문에 힘썼다. 의성에 거주하는 안동김씨의 학문적 성향은 ‘대산학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김양손 역시 이상정의 강학 공간인 고산정사와 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온다.
수취인은 최효술로 상정했는데, 그의 어머니 진양정씨가 1853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최효술의 본관은 慶州, 자는 穉善, 호는 止軒이다. 百弗庵 崔興遠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湜이며, 어머니는 晉州鄭氏로 立齋 鄭宗魯의 딸이다. 그는 외할아버지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0년에 遺逸로 천거되어 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865년에 敦寧府都正을 거쳐 副護軍에 이르렀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柳致明 · 李秉夏 · 李敦禹 · 이휘령 · 이원조 · 孫亮述 등 영남의 석학들과 학문적인 교유가 있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主理論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음양역리학에 대하여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지헌집』15권 7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