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36년 최상룡(崔象龍)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36.2714-20150630.K271400054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최상룡, 최효술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작성시기 1836
형태사항 크기: 28 X 25.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36년 최상룡(崔象龍) 서간(書簡)
1836년 6월 27일에 최상룡이 안부를 주고받고, 서울행 때 있었던 일들과 손자의 죽음 등의 근황을 알리고자 옻골의 최 씨 댁에 보내는 편지이다. 쇠약한 몸으로 서울행을 떠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누이를 만났던 일, 상주 우산의 문집 간행소에 머물면서 책판 교정을 본 일, 오랜 장마로 물이 불어난 상황에서도 무사히 집에 도착한 일, 집에 도착하자 자신의 어린 손자의 죽음을 겪게 된 일, 수재(水災)를 당한 근황, 상대 외숙(外叔)의 병에 대한 걱정, 종이 거래에 대한 상황 등의 사연들이 있다.
1차 작성자 : 김동현

상세정보

1836년 6월 27일, 崔象龍이 안부를 주고받고, 서울행 때 있었던 일들과 손자의 죽음 등의 근황을 알리고자 옻골의 최 씨 댁에 보내는 편지
1836년 6월 27일에 崔象龍(1786~1849)이 안부를 주고받고, 서울행 때 있었던 일들과 손자의 죽음 등의 근황을 알리고자 옻골의 최 씨 댁에 보내는 편지이다.
처음 상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 하면서 상대의 三從氏(8촌 형제)를 통해 안부를 전해 들었다고 하였다. 특히 상대측의 이사하는 노역이 끝나 현재는 편안해졌다는 소식에 대해 매우 축하하였다. 자신의 경우는 쇠약한 몸으로 서울행을 떠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누이를 만났던 일, 尙州 愚山의 간행소에 체류하며 문집의 교정을 본 일, 오랜 장마로 물이 불어난 상황에서도 무사히 집에 도착한 일 등의 근황을 알렸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자 자신의 어린 손자의 죽음을 겪게 되어 세상사에 원만함을 얻기란 어려운 것 같다고 하며 슬픔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외에도 水災를 당한 근황과 상대 外叔의 병에 대한 걱정, 白紙 거래에 대한 상황 등의 사연들을 적고 있다.
발급인인 최상룡은 본관은 경주, 자는 德容, 호는 鳳村이며, 부친은 崔興漢, 立齋 鄭宗魯의 문인이다. 1822년 式年試 생원에 입격하였다. 1823년 영남만인소 때 疏首로 활동한 이력도 있다. 최상룡은 상대에 대해 ‘罪族末’이라고 표현하였는데, ‘罪’는 자신이 親喪을 당했을 경우 쓰는 용어이고, ‘族末’은 친족의 서열 끄트머리에 있다는 표현으로 일종의 겸칭이다. 피봉에 보이는 ‘江洞’은 대구 봉무동의 옛 지명으로 대구 옻골과 함께 경주 최씨의 세거지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강동에 사는 경주 최씨 최상룡이 친족인 옻골의 경주 최씨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기상 百弗庵 崔興遠의 손자인 止軒 崔孝述(1786~1870)일 가능성이 높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본문에 등장하는 ‘우산’은 晉州鄭氏의 세거지로 愚伏 鄭經世 이하 입재 정종로의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지역이다. ‘우산의 간행소에서 문집 교정을 본 일’은 최효술의 외조부가 정종로인데, 이를 통해 경주 최씨와 진주 정씨 간의 혼반관계로 인해 최상룡우산의 문집 교정에 간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김동현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36년 최상룡(崔象龍) 서간(書簡)

柒溪 經案 執事。
江洞 罪族末 候疏。
稽顙白。自愚山歸後。瞻想倍簁於恒品。而路憊兼以憂冗。旣
未能晋敍多少。又以霖雨便阻。以書替伸。亦未及時。此心耿鬱。當復
何如。昨日路逢令三從氏。細詢如許長潦。
太碩人鼎茵以時神衛。
侍省德履萬珍。向來積月搬寓憂勞之節。次第得後笑之慶。
豈敢以哀忱之無況於世。而不爲之仰賀萬萬哉。罪族末。罪積有素。
今行又多違。歸見一箇幼孫化成一壞塚。寃憤不可堪抑。第念今
番西行。實是妄發。衰麻之身也。潦炎之節也。數百里遠役。是豈成
道理。而但幸始滯雨於病姊寓舍。敍同氣之情。得盡旬餘。繼又滯
愚山刊所。方其工役之誠。已至數日。雨水之盛。鄕儒無來。而敢以
愚昧之見。略有些商量於丁乙存刪之節。
顧於一事之義。似少效己分。久曠侍奠之
罪。以此可自恕。而又於返程之日。得免危險
於水漲乾坤。這間若有得天佑者多。而及
到便見此寃慘。世事之得其圓滿。若是乎
難哉。刊事之顚末。是
執事之深欲聞者。且以
無似見所見言之。固非一
兩日之所可盡者。豈不
欲趁卽晋攄。而大水後
凡事便成劫後光景。
蔘圃之沒數毁傷。朴
生之防堤頹落。是皆
不容少緩之役。所以忍病作氣。逐日關檢。自歎身世之益
辛酸。而向門屛。猶不勝憧憧之私耳。令渭陽丈以痢
症四五日甚劇。未見其快服而歸。未知其間加減如何。此書成
於未病時。故不及其症候耳。春初白紙去來時。八戔銅自
愚山付送云云。而紙來而銅不來。執事或忘之耶。
傳者或誤耶。餘萬都在面悉。姑荒迷不備疏禮。
丙申 六月 卄七日。罪族末 象龍 拜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