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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최상룡(崔象龍)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30.2714-20150630.K27140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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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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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최상룡, 최효술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작성시기 1830
형태사항 크기: 23.5 X 27.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30년 최상룡(崔象龍) 서간(書簡)
1830년 5월 26일 친척인 최상룡이 제사와 관련된 일을 물어보기 위해 최효술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의 주요 쟁점은 효명세자의 국상을 어떻게 지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것이다. 최상룡의 경우 성복 후 인산 전에 기제사를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있다. 또한 공부 중에 대소공(大小功)의 공(功)자와 시마(緦麻)의 시(緦)의 뜻을 잘 모르겠으니 당신께서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인호

상세정보

1830년 5월 26일 친척인 崔象龍이 제사와 관련된 일을 물어보기 위해 崔孝述에게 보낸 편지
1830년 5월 26일 친척인 崔象龍(1786∼1849)이 제사와 관련된 일을 물어보기 위해 崔孝述(1786~1870)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는 잘 지내시고 병도 없어서 다행스럽다고 하고 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번에 국상이 발생하여 그와 관련된 관리들의 복제에 대한 반포가 내렸는데 사서인의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아서 의심되는 점을 상대에게 묻고 있다. 최상룡은 퇴계선생이 언급한 글을 인용하여 6,7일이 지난 후에 묘제를 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고 언급하고 성복 후 인산 전에 기제사를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있다. 또한 공부 중에 大小功의 功자와 緦麻의 緦의 뜻을 잘 모르겠으니 당신께서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글에서 언급한 국상은 바로 효명세자의 국상을 언급하고 있다. 효명세자의 경우 1827년부터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였던 점 때문에 일반적인 상례와 어긋나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추록에는 선비가 그냥 지나가 세통의 편지를 부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고 있다.
발급자 최상룡은 본관은 慶州, 자는 德容, 호는 鳳村 으로 達城江洞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崔興漢이며, 어머니는 靈山辛氏인 辛光俊의 딸이다. 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23년 서얼을 등용할 것을 요청하는 만인소에 참여 하였다. 향리로 돌아와 讀巖書堂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司馬所를 중수하고 향약의 세부지침을 만들어 보급하였다.
수취자 최효술은 본관은 경주, 자는 穉善, 호는 지헌이며, 부친은 崔湜이고, 모친은 晋州鄭氏이다. 立齋 鄭宗魯의 외손이다.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60莊陵參奉에 임명되고, 그 뒤 敦寧府都正을 거쳐 副護軍에 이르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邪敎를 극렬히 배척하는 주장을 폈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柳致明을 비롯하여 李秉夏李敦禹이휘령李源祚孫亮述 등 영남의 석학들과 학문적인 교유가 있었다.
이 편지는 조선시대 예학에 대한 모습을 일부 살펴볼 수 있는 모습이다. 영남의 사대부들은 예학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정도를 바로잡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들을 벌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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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30년 최상룡(崔象龍) 서간(書簡)

柒溪 侍學案 執事。
江洞 族末 狀上。【省式謹封】
國家慘變。哀展率普。伏惟潦炎。
太碩人匙箸節。以時康和。
侍餘經候。珍重。仰賀區區不任。族末。慈候粗
遣。兒曹俱免恙。是爲私幸。而惟是俗務。近益叢
集。惠借老先生集。已過數旬。尙未一日開卷如
是。而敢望有所進取耶。伏想下執事。必不空
費寸陰。而日有所造矣。今番頒下儀節。只言
朝野服制。而不及於士庶行祭。如何。尋常致疑。
嘗見退溪先生與門人書【在十九卷】。言東宮喪禮。而言
外方士人之家。過六七日後。行廟祭。恐無不可。又嘗
言國恤卒哭前。士大夫於私家時祭。不可。行忌。
祭墓祭。可行【在十五卷】。今我
世子喪事。自別於凡他東宮喪。則過六七日。行廟祭
似不合禮。且以卒哭前。忌祭可行之訓。觀之。則
因山之前。行忌祭。恐無妨。家間今有忌日。而今
番國喪禮。
又是亡於禮之禮。
則當此成服後。
因山前而行忌祭。
未知如何。以鄙意
行之。而但不備禮。
未知是否。伏望
回敎。近與一友論禮。而問大小功之功字。緦麻之緦字
意。而不能答。此必有說矣。執事想素講解矣。竝爲
示破如何。先逹事。皆未行公云。拔落將不知如
何。爲之代憫。餘。雨晴後。進圖晉拜耳。都留。不備狀
禮。
庚寅 五月 卄六日。族末 象龍 拜手。

近或有草林便耶。頃又因雅之違約戛過。不得
付三度書。非鄙誠薄。而罪歎則深矣。因何謝此意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