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5월 26일 친척인 崔象龍이 제사와 관련된 일을 물어보기 위해 崔孝述에게 보낸 편지
1830년 5월 26일 친척인 崔象龍(1786∼1849)이 제사와 관련된 일을 물어보기 위해 崔孝述(1786~1870)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는 잘 지내시고 병도 없어서 다행스럽다고 하고 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번에 국상이 발생하여 그와 관련된 관리들의 복제에 대한 반포가 내렸는데 사서인의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아서 의심되는 점을 상대에게 묻고 있다. 최상룡은 퇴계선생이 언급한 글을 인용하여 6,7일이 지난 후에 묘제를 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고 언급하고 성복 후 인산 전에 기제사를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있다. 또한 공부 중에 大小功의 功자와 緦麻의 緦의 뜻을 잘 모르겠으니 당신께서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글에서 언급한 국상은 바로 효명세자의 국상을 언급하고 있다. 효명세자의 경우 1827년부터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였던 점 때문에 일반적인 상례와 어긋나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추록에는 정 선비가 그냥 지나가 세통의 편지를 부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고 있다.
발급자 최상룡은 본관은 慶州, 자는 德容, 호는 鳳村 으로 達城의 江洞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崔興漢이며, 어머니는 靈山辛氏인 辛光俊의 딸이다. 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23년 서얼을 등용할 것을 요청하는 만인소에 참여 하였다. 향리로 돌아와 讀巖書堂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司馬所를 중수하고 향약의 세부지침을 만들어 보급하였다.
수취자 최효술은 본관은 경주, 자는 穉善, 호는 지헌이며, 부친은 崔湜이고, 모친은 晋州鄭氏이다. 立齋 鄭宗魯의 외손이다.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60년 莊陵參奉에 임명되고, 그 뒤 敦寧府都正을 거쳐 副護軍에 이르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邪敎를 극렬히 배척하는 주장을 폈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柳致明을 비롯하여 李秉夏 ‧ 李敦禹 ‧ 이휘령 ‧ 李源祚 ‧ 孫亮述 등 영남의 석학들과 학문적인 교유가 있었다.
이 편지는 조선시대 예학에 대한 모습을 일부 살펴볼 수 있는 모습이다. 영남의 사대부들은 예학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정도를 바로잡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들을 벌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