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7년 1월 29일, 李魯淳이 근황을 전하고 아들의 婚事와 관련하여 돈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7년(순조 17) 1월 29일에 李魯淳이 근황을 전하고 아들의 婚事와 관련하여 돈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장문의 편지는 크게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李秉淳의 안부를 묻는 부분과, 전염병을 피해 다른 곳에 나가 생활하고 있는 李魯淳 자신의 근황을 전해 주는 부분, 아들의 혼삿날을 택일한 것과 관련하여 이유를 설명한 부분, 婚事에 필요한 돈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하는 부분 등으로 나누어진다. 李秉淳의 안부를 묻는 대목에서는, 특히 귀가 먹어 들리지 않는 증상이 다시 발작하지는 않았는지 官事도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가 없는지 물었다. 李魯淳 자신의 근황을 전해 주는 대목에서는 주로 전염병과 관련된 인명 피해 상황을 상세히 언급하였다. 이미 3년 사이에 아들과 딸 하나씩을 잃은 상황에서 이달 8일에 열여섯 먹은 셋째아들을 전염병으로 잃었다고 하였다. 자신이 친지와 형님들을 떠나 나와 있었던 계기가 모두 자녀들을 지키려는 계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즉시 정리하고 돌아가고 싶으나 몇 칸의 비새는 집이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 22일에는 季女가 전염병에 걸렸고 24일에는 손녀가 또 걸렸다고 하였으며, 나머지 두 아들은 모두 雜症은 없다고 하면서 이대로 무탈하게 마무리된다면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는 방도가 있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아들의 혼삿날을 택일한 것과 관련해서는, 承兒의 혼삿날이 갑자기 다음달 16일로 정해졌다고 하였다. 아직 전염병으로 죽은 아이의 葬禮를 치르지 못하여 成婚할 시기가 아니나 저쪽 집안에 劇憂가 있어 혼례를 매우 심하게 재촉했다고 하였다. 또 좌우 친지들이 권유하여 柱單을 지난번에 보냈다고 하였다. 이곳 여러 사람들이, 여름과 가을을 지나도 천연두가 사라질 것이라 기필할 수 없으니 죽은 아이의 葬禮가 몇 월에 있을지 알 수가 없고 情理가 비록 절박하더라도 어찌 임시로 변통할 방도가 없겠느냐는 취지로 의논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결국 내달 16일에 아들의 婚事를 치를 계획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婚事에 필요한 돈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하는 부분에서는, 자신의 곤란한 처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뒤 官庫에 비록 여분이 없더라도 50金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울러 色扇과 簡紙도 넉넉하게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