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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목태석(睦台錫)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16.0000-20150630.0625257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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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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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목태석, 이병순
작성시기 1816
형태사항 크기: 32.6 X 55.6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의인 진성이씨 의인파 은졸재고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16년 목태석(睦台錫) 서간(書簡)
1816년 3월 4일에 목태석(睦台錫)남호두(南好斗) 형제의 처리 문제와 관련하여 이병순(李秉淳)에게 보낸 편지이다. 순영(巡營)에서 남호두 형제를 체포하여 창전(倉錢)을 징수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그런데 일전에 화원(華院)에서 이 형제가 유생이라는 이유로 징수를 못하게 하고 수리(首吏)를 추착(推捉)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미 화원과 관련된 일이 되었으니 이병순에게 유향소에 전령을 보내어 형제를 체포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라고 청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순주

상세정보

1816년(순조 16) 3월 4일에 睦台錫南好斗 형제의 처리 문제와 관련하여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6년(순조 16) 3월 4일에 睦台錫南好斗 형제의 처리 문제와 관련하여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번에 李秉淳가 보내준 답장을 받고서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화창한 봄에 수령 정사를 살피고 있는 李秉淳의 체후가 건승할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아울러 본직과 겸직의 사무가 정신을 괴롭게 하는 부분이 많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매우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睦台錫 자신은 집안사람들이 그럭저럭 평안하게 지내고 있으니 매우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淸州의 상놈 南好斗 형제에 대해서 倉錢을 징수하는 일로 巡營에 論報하였는데, 回題에 비록 그들을 州獄에 捉囚하고 倉錢을 징수하여 보내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일전에 華院(華陽書院인 듯함)에서 형제가 院生이라는 이유로 징수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首吏를 推捉하기까지 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李秉淳이 華院의 이러한 作弊에 대해서 익히 잘 알고 있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문제가 이미 華院과 관련되어 있으니 倉穀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그대로 내버려둘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睦台錫李秉淳에게 즉시 留鄕所에 傳令하여 형제를 체포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라고 청하였다. 만약 혹시라도 갈등이 심해지게 된다면 淸安縣과 栗峯驛이 모두 구설수에 오를 것이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睦台錫는 이 당시 栗峯察訪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 편지를 통하여 官權 위에 군림하고 있던 華院의 위세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끝으로, 都目政事에 대한 것은 아직도 확보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올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16년 목태석(睦台錫) 서간(書簡)

向者
下覆。伏承而慰。伏惟春和
政餘體度崇護萬相。伏漽
區區。本兼事務。想多貽惱。
亦甚仰慮。侍生。庭信粗寧。
是幸何喩。就淸州南好
兄弟以徵捧倉錢事。論
報巡營矣。回題雖有捉囚。
州獄捧送之敎。而日前。自
華院謂以院生。使之勿捧。至
有推捉首吏之擧。此弊想
亦稔悉矣。旣與華院相關。
則倉穀猶屬第二件事置之
外。無他道。奈何。幸卽傳令
于留鄕。使之撤捕。以爲息鬧之地。如或
轉致葛藤。則貴縣弊郵。俱有嘖言。可慮
故耳。都政尙未得見。不
得仰呈耳。餘。不備。伏惟
下察。
丙子 三月 四日。侍生 睦台錫 拜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