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순조 15) 9월 그믐날에 兢菴 姜世揆(1762~1833)가 흉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5년(순조 15) 9월 그믐날에 兢菴 姜世揆(1762~1833)가 흉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피봉의 내용으로 보면, 수신자인 李秉淳은 淸安縣監으로 재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李秉淳은 1814년(순조 14) 1월에 淸安縣監으로 제수되었다. 姜世揆는 尙州 출신의 官人이자 학자이다. 定齋 柳致明이 지은 墓碣銘에 따르면, 그는 1797년(정조 21)에 正言으로 제수된 바 있다.
먼저, 가을이 깊어져가는 때에 수령 정사를 살피고 있는 李秉淳이 건강한지 등 안부를 물었다. 姜世揆는 지난번의 흉년과 올가을의 좋지 못한 작황에 따른 근심스런 마음을 전하고, 봄에 李秉淳이 보리를 보내주었던 우정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여전히 굶어죽는 상황을 면치 못하였는데 李秉淳이 장차 어떻게 계속해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익살스럽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상대방이 장차 계속해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景伯(龍谷 李程淳) 兄이 首望으로 擬望되었으나 낙점을 받지 못한 일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였다. 李秉淳의 조카가 右試(右道에서 보이는 科試)에 응시하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끝내 그와 만나지 못했다고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끝으로, 姜世揆는 자신의 조카아이가 서울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李秉淳이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淸安縣에 들를 것이라고 하면서 크게 바쁘지 않다면 조카아이가 인사를 올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