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8월 13일, 韓性謙이 손자를 잃은 데 대해 위로하고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5년(순조 15) 8월 13일에 韓性謙(1750~?)이 손자를 잃은 데 대해 위로하고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李秉淳이 손자를 잃었다는 소식을 月前에 듣고 놀라고 슬픈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으나 정말인지 몰라서 위문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河陽 兄을 통해 그 소식이 정말임을 듣고 알았다고 하면서, 이것이 무슨 이치냐고 반문하였다. 노년에 李秉淳이 어찌 참혹한 심정을 감내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드리는 것 외에는 달리 위로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하였으며, 애통한 마음을 십분 억누르시기를 오직 바란다는 상투적인 말 대신에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李秉淳이 이 시기에 손자를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服中에 수령 정사를 살피고 있는 李秉淳과 그 식구들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해가 지나도록 병을 앓아 근력이 소진되었는데 30여 일 동안이나 毒痢를 앓아 거의 죽다가 간신히 살아났으나 언제 완전히 회복될지는 모르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뜻밖의 일 때문에 黜齋를 당하여 객지에서 고생하며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고향 집의 경우 가까운 이웃사람들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에 돌아가지도 못하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몸을 조리하고 건사하는 건 고사하고 모든 상황이 형편없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금일 榮川의 道會所로부터 通文이 도착하였는데 吳瑛과 金升淵이 斥邪를 假托하여 기쁜 마음으로 護逆한 죄에 대해 준엄하게 비판하는 요지라고 하였다. 『紀年東史約』에 따르면, 이 시기에 유생 李致容, 鄭基祖, 吳瑛 등은 通文을 작성하여 邪學의 流行과 관련하여 蔡濟恭과 李益運의 죄를 성토한 바 있다. 金熙周의 『葛川集』에는 이를 卞誣하는 상소문이 실려 있기도 하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