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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이원연(李元延)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14.4717-20150630.062525700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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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원연, 이병순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14
형태사항 크기: 28.3 X 41.2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의인 진성이씨 의인파 은졸재고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14년 이원연(李元延) 서간(書簡)
1814년(순조 14) 7월 3일에 이원연(李元延)이 과거 응시 과정에서 발생한 빚을 갚는 일과 관련하여 30냥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이병순(李秉淳)에게 보낸 편지이다. 30냥을 모쪼록 변통해서 보내 주면 수년 내로 자신이 갚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선주

상세정보

1814년(순조 14) 7월 3일에 李元延이 科擧 응시 과정에서 발생한 빚을 갚는 일과 관련하여 30냥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4년(순조 14) 7월 3일에 李元延이 科擧 응시 과정에서 발생한 빚을 갚는 일과 관련하여 30냥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元延은 본관이 延安으로, 1813년(순조 13)에 增廣 文科에 급제하였다. 그의 부친은 李之受인데, 李之受李秉淳의 조부인 李世述의 첫째사위이다. 따라서 李秉淳에게 李之受는 고모부가 되고, 그의 아들 李載延은 고종사촌이 된다.
李元延은 지난달 24일에 있었던 政事에서 자신이 成均館 관원의 首望에 擬望되었다가 正言에 通望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다만 전에 없던 災年을 만난 상황에서 科擧 응시 과정에 진 빚을 아직 다 갚지 못했다고 하였다. 서울에 들어온 뒤로 빚을 갚으라는 독촉이 심한 상황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30냥을 모쪼록 변통해서 보내 주면 수년 내로 자신이 갚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수령인 李秉淳이 일반 사람보다는 형편이 나을 것이기에 이렇게 부탁한다고 하였으며, 이달 열흘 전에 인편으로 부쳐 보내달라고 당부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14년 이원연(李元延) 서간(書簡)

淸安 政閣 執事 入納。
表從弟 正言 在平橋 上平書。 謹封。[手決]
閱歲阻候。慕菀二字。猶屬
歇後語也。大旱餘霖雨支離。
伏未審此時
政中體候連享萬安。衙眷俱得
安穩耶。頃逢仲兄主行次於嶺
路。拚荊半晌。心如有得將兒利稅
之奇。無階承聞。尤切沓沓也。灾歲
居官。決非老人之所可堪者。只切奉
慮不任。表從弟。去念日艱關入城。本
病挾憊添㞃。見方委痛。苦惱之狀。
如何盡達。上來後。累次付書於西衙。
而姑未聞安報。紆菀欲狂。去卄四日政。
纔入國子首擬。旋通正言。感蹙何極。第
當此挽古所無之災年。措手無路。科債
尙未了當。入京後。債督備至。此將奈何。
三十兩錢。某條推移以送。則數年內
從弟亦有報償之便矣。另施另施。以濟此窘。
如何。非曰官況有餘。而措手之道。
猶勝於私家。故如是告悶。今旬
前因便付送。則可助萬一矣。餘。便甚
忙。姑不備。伏惟下監。上書。
甲戌 七月 初三日。表從弟 元延 拜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