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순조 13) 1월 19일에 金熙敎가 致祭 행사에 꼭 참석해 달라고 청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3년(순조 13) 1월 19일에 金熙敎가 致祭 행사에 꼭 참석해 달라고 청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熙敎는 본관이 義城으로, 一枝窩 金宅東의 아들이다. 그의 형인 海隱 金熙成의 딸 義城金氏가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과 혼인하였으므로, 그와 李秉淳은 戚分이 있다.
먼저, 李秉淳이 말미를 받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기쁘게 만나고 싶었으나 형편상 그러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 추위를 무릅쓰고 여행한 李秉淳의 건강이 상하지 않았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위안이 되면서도 안부가 궁금하다고 하였다. 다만 李秉淳이 중첩되는 喪事를 당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마치 鶴을 타고 오랜 세월 뒤에 고향으로 돌아온 丁令威의 감회가 깊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자신은 李秉淳이 6품직에 오르리라는 것을 본래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李秉淳이 곧장 詞訟 官衙로 遷轉된 것에 대해 매우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또 이제부터 노년에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는 수고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서, 매우 축하드린다고 하였다. 金熙敎 자신은 쇠약한 건강 상태가 더욱 심해지고 있고 전에 없던 추위를 당하여 장기간 이불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고민스러운 일 또한 많다고 하였다. 李秉淳이 다시 언제 출근하게 되는지 물었다. 자신의 從叔 집안의 致祭가 내달쯤에 있을 듯 하다고 하면서, 그때 李秉淳이 왕림해 준다면 몇 년 동안 갖지 못하던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