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3월 15일, 李泰淳이 돈 문제 등과 관련하여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2년(순조 12) 3월 15일에 草草庵 李泰淳(1759~1840)이 돈 문제 등과 관련하여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피봉의 내용으로 보면, 수신자인 李秉淳은 義禁府都事로 재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는 司饔院奉事로 임명되었다가 義禁府都事 呂東根과 서로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 발신자인 李泰淳은 梁山郡守로 재직하고 있었다. 피봉의 宜春은 梁山의 別號이다. 먼저, 지난번 泮主가 돌아가는 편에 보낸 답서를 李秉淳이 이미 보았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義禁府都事의 직임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直宿하느라 건강이 나빠지지는 않았는지 안부를 물었다. 일전에 邸吏 편으로 계속해서 李秉淳의 편지를 받았으나 다시 격조하게 되어 답답했다고 하였다. 李泰淳 자신은 현재 宴享하는 일로 東萊府로 출발하였으니 매우 근심스럽고 괴롭다고 하였다. 銅貫에 관한 일은 事勢로 보아 그럴 듯도 하지만 쇠잔한 고을인 梁山의 형편에 차후 酬應하는 것이 난감할 것이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미상이다. 庭科가 머지않았으니 禮安의 여러 儒生들이 필시 李秉淳에게 많이 와서 청탁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일체 들어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추신에서는, 들을 만한 서울 소식이 있거든 상세히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