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2월 15일, 李泰淳이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2년(순조 12) 2월 15일에 草草庵 李泰淳(1759~1840)이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해가 바뀌고 달도 바뀌었는데 소식이 오랫동안 격조하니 그리움만 간절했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泮主 편으로 李秉淳의 편지를 받아 바삐 읽으니 종이가 닳는 줄도 몰랐다고 하였다. 또 편지를 읽고서 義禁府都事로 直宿하고 있는 李秉淳이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경하했다고 하였다. 李泰淳 자신은 늙은 처를 떠나보내고 텅 빈 관아에 우두커니 앉아 지내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당시 李泰淳은 梁山郡守로 재직하고 있었다. 또 분주한 공무는 한결같이 예전과 같아서 고민스럽다고 하였다. 洪景來의 반란 사건에 대하여 근래 朝報를 보건대 거의 모조리 토벌되었다고 하니, 국가의 다행스런 일이라고 하였다. 또 柳 學士(鶴栖 柳台佐로 보임)가 이미 本職에서 체차되었으니 아마도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그 외의 벗들은 누가 서울에 머물고 있고 누가 돌아갔는지 들은 바가 없기에 답답하다고 하였다. 자신의 큰아들이 庭科에 응시할 것이라고 하면서, 관직에 있는 자가 빈한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官庫의 상황이 점점 형편없어지고 있으니 도리어 우습고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劣簡 40幅을 올린다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