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순조 12) 10월 4일에 金熙敎가 안부를 교환하고 상대 집안의 여러 喪事에 대해 위로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2년(순조 12) 10월 4일에 金熙敎가 안부를 교환하고 상대 집안의 여러 喪事에 대해 위로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熙敎는 본관이 義城으로, 一枝窩 金宅東의 아들이다. 그의 형인 海隱 金熙成의 딸 義城金氏가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과 혼인하였으므로, 그와 李秉淳은 戚分이 있다. 피봉의 내용으로 보건대, 당시 李秉淳은 尙瑞院 관원으로 재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李秉淳은 尙瑞院副直長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먼저, 서쪽과 남쪽으로 멀리 헤어진 뒤로 몇 년 동안이나 격조하여 때때로 그리워하며 서글픈 마음만 간절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李秉淳이 멀리서 편지를 보내 주고 겸하여 부채까지 보내 주었다고 하면서, 위로되고 감사한 마음이 매우 컸다고 하였다. 특히 李秉淳이 6품 승진이 머지않은 데 대해 기쁜 마음을 전하였다. 金熙敎 자신은 衰病이 점점 심해져서 식욕이 부진하고 정신과 근력이 날로 쇠약해지니 죽을 날이 가까워졌음을 스스로 알겠다고 하였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孤孫 형제가 無病하고 次孫이 痘症을 순조롭게 치렀으니 이것이 크게 마음이 놓이는 부분이라고 하였다. 과부의 신세로 養子를 데리고 외롭게 빈집을 지키고 있을 李秉淳의 며느리를 생각해 보건대 이것이 객지에 있는 李秉淳의 잊기 어려운 근심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앞으로는 머지않아 단란하게 모일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다만 李秉淳 집안에 慘慽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江亭의 伯哥가 또 요절한 데 대해 그 사람됨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팔순 偏親을 모시고 있던 처지에서 그 참혹한 심경을 차마 얘기할 수도 없는 지경이라고 하였다. 또 幼般 戚從이 가까운 이웃에 살아 날마다 어울리면서 무료한 회포를 위로해 주었는데 뜻밖에 그 내외가 일시에 요절하여 이미 葬禮를 지냈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애통하다고 하였다. 더구나 伯恭(鄭必良) 妹兄이 죽은 지 벌써 3년이 되었다고 하면서, 참담한 심경을 표하였다. 그런데 생질의 말을 듣건대 李秉淳이 아직까지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고 하니, 친척에게 후한 성품을 지닌 李秉淳이 어찌 이렇게 할 리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이는 필시 편지가 중간에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서 그럴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의 아들과 從孫들이 科擧를 보러 갔다고 하면서, 잘 지도하여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