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순조 12) 4월 15일에 李同淳이 관직 임명과 관련하여 모종의 부탁을 하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2년(순조 12) 4월 15일에 樊广 李同淳(1779~1860)이 관직 임명과 관련하여 모종의 부탁을 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달의 편지를 통해서 李秉淳가 靈光으로 出使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이에 대해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노인인 李秉淳가 왕명을 받들고 먼 곳으로 나간 상황에 대해 모두 가슴아파했던 광경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러나 純祖가 건강을 이미 회복하여 만백성들이 기뻐하고 있으며 洪景來가 토벌되어 떠들썩한 소문을 지어냈던 자들이 모조리 孥戮되었으니 국가의 경사가 매우 크다고 하였다. 다만 純祖의 건강이 회복된 데 따른 陳賀에 자신이 참석할 길이 없는 데 대해 통탄스럽다고도 하였다.
이어 李秉淳의 官運은 운이 텄다고 할 만하다고 하면서, 초반에는 비록 매우 바쁜 직무를 맡았으나 뒤에는 副窠로 遷轉된 것은 참으로 천만 뜻밖의 일이라고 하였다. 吏曹의 담당자가 잊지 않고 배려해 준 것에 대해 자신이 감사한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도 하였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 시기에 李秉淳는 義禁府都事로 있으면서 지방으로 出使하기까지 하였으나 推鞫이 벌어지는 시기에 義禁府都事 인원에 빠진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義禁府의 청으로 인하여 典牲署副奉事 韓用鎬와 서로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 李同淳은 내년 6월의 大政에서 李秉淳가 수령 자리에 제수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면서도, 모두 하늘에 달린 것인 만큼 미리 기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純祖의 건강이 회복된 데 따른 사면령이 있을 것이므로 李秉淳가 敬差官 자리를 얻어 고향을 찾아 자신이 만날 수 있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李同淳은 兩親께서 늘 병으로 신음하시는데 지난겨울에 얻은 咳嗽가 이전에 비해 크게 덜해지기는 하였어도 근력 등 모든 상황이 걱정스러워 제 몸은 돌볼 여가도 없는 애타는 상황에 대해 전해 주었다. 근처에 전염병 기운이 사방으로 에워쌓으나 자신의 마을은 현재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면서,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이어 집안에서 시집 장가간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하에서는 李同淳 자신의 관직 진출과 관련된 사연이 서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李秉淳가 보내준 편지의 말미에 언급된 내용을 보건대 그것이 만약 이뤄진다면 陵官이나 郵官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미리 힘을 다해 각별히 도모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또 만약 반드시 성사될 가능성이 있다면야 6월의 都目을 놓치더라도 개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돌아오는 인편에 이에 대해 답변을 달라고 당부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