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10월 1일, 李同淳이 모종의 일에 대해 부탁하고 鄕中의 여러 소식들을 전하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2년(순조 12) 10월 1일에 李同淳(1779~1860)이 모종의 일에 대해 부탁하고 鄕中의 여러 소식들을 전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9월 18일에 보낸 편지를 보고 이때 直宿하고 있는 李秉淳가 무탈하고 임금의 거둥을 隨駕한 때에도 평안하게 다녀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로 날짜가 많이 지났다고 하면서, 李秉淳의 안부를 물었다. 李同淳 자신은 어버이께서 장기간 위태로우셔서 애를 태우는 와중에 자신도 痢症으로 인해 거의 죽었다가 겨우 회생하여 이제 막 차도가 있기는 하나 완전히 소생할 기약은 없다고 하면서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李秉淳가 편지에서 언급한 일에 대해서는 李秉淳가 잊지 않고 유념해 주는 것이 이처럼 열심이니 감사하는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내년 여름 이후로는 더는 살피는 일이 없을 것이니 장차 어이하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돌아오는 인편에 상세히 답변해 달라고 당부하였는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추신에서는, 梅園 숙부님의 喪事에 대해 참혹한 마음을 표하고 이후 원근이 소란스럽고 비방하는 말이 날마다 이를 것이니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 몇 달 상간에 至親이 세 사람이나 사망한 것은 지극한 변고라고 하였다. 9월 27일에 禮安鄕校에서 道會가 열렸는데, 大山 李象靖을 追享하는 일에 대해 道儒의 논의가 일치했다고 하였다. 廬江書院에 定所하여 任員을 정하고 疏廳을 열었는데, 疏頭는 浮浦의 芝涯 형님이 되고 掌議는 柳晉春과 金虎燦이 되었다고 하면서,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廬江書院의 位牌 遷動 문제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