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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이성순(李性淳)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12.0000-20150630.062525700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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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성순, 이병순
작성시기 1812
형태사항 크기: 21.6 X 39.7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의인 진성이씨 의인파 은졸재고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12년 이성순(李性淳) 서간(書簡)
1812년 2월 29일에 이성순이병순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신과 주변, 그리고 상대와 그 주변의 근황을 물은 뒤에 의금부의 직임은 연소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욱이 역옥이 전개되는 시기에 69세의 이병순이 감당하지 못할 우려가 있을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한편, 유림들이 부언을 선동하여 고을의 인심이 진정되지 않고 있는 상황과 촌중의 결혼 소식에 대해 전해 주었고, 또 추신에서는, 치겸이 수령이 되어 출성했다고 하니 매우 다행스럽지만, 고을이 잔박하여 그가 바라던 바와 부합하지 않으니 도리어 우습고 안타깝다고 하였다.
1차 작성자 : 김효심

상세정보

1812년 2월 29일, 李性淳이 바쁜 시기에 義禁府都事로 임명된 데 대해 걱정스런 마음을 전하고 여러 고향 소식들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2년(순조 12) 2월 29일에 李性淳(1757~1819)이 바쁜 시기에 義禁府都事로 임명된 데 대해 걱정스런 마음을 전하고 여러 고향 소식들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性淳李秉淳의 막내 동생이다. 먼저, 이달 22일에 李秉淳이 13일에 부친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그 후로 여러 날이 지났기에 궁금한 마음이 간절하다고 하였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仲兄[李民淳]에게서 直宿하고 있는 李秉淳이 평안하고 식사 등 모든 상황이 변함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義禁府의 직임은 평상시에 年少한 사람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逆獄이 전개되는 시기에 望七의 李秉淳이 감당하지 못할 우려가 있을까 염려된다고 하면서, 과연 탈이 생길 우려는 없는지 물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李秉淳은 당초 司饔院奉事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달 5일에 義禁府都事 呂東根과 서로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洪景來 세력이 그간에 이미 소탕되었는지 묻고, 아직까지 깨끗이 소탕되었다는 소식이 없어 분통하다고 하였다. 이어 집안 소식을 李秉淳에 전하였다. 仲母의 기력은 여전하시고 각 집안사람들이 큰 우환은 면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바래미의 姪婦 및 李秉淳의 순자가 무탈하고 蟻谷 姪婦의 乳����도 거의 완쾌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 집안의 우환은 수시로 생겼다가 없어지고 있다고 하면서, 걱정스런 마음을 표하였다. 자신의 병은 근래 불순한 날씨 탓에 심해져서 현재 喘息을 앓으며 보내고 있다고 하였으며, 내일 있을 祭祀에 다시 참석하지 못하니 추모의 정이 더욱 간절하다고 하였다. 더구나 李秉淳의 경우 먼 서울에 있어서 여러 해 동안 祭祀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애통한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李秉淳李性淳의 부친인 李龜朋이 3월 1일에 사망하여, 다음날에 그의 忌祭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의 儒林들이 浮言을 선동하여 고을의 인심이 진정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였다. 다음으로, 村中의 결혼 소식에 대해 전해 주었다. 끝으로, 李秉淳이 말미를 얻어 還鄕할 방도가 없어 형제가 만나기 쉽지 않다고 하면서 病勢 외에도 혹 뜻밖의 사고가 벌어지게 된다면 형제가 언제 다시 상봉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穉謙[李載延]수령이 되어 出城했다고 하니 다행스럽기는 하나 고을이 殘薄하여 그가 바라던 바와 부합하지 않으니 도리어 우습고 안타깝다고 하였으며, 그밖에 여러 주변 소식을 전해 주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李載延은 이달 19일에 新昌縣監으로 임명된 바 있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12년 이성순(李性淳) 서간(書簡)

今卄二。伏見十三日所付書。而厥後有日。方
切慕鬱之誠。仲兄無撓還鄕。伏聞
直中氣體候平安。匙匕凡節無減云。私心
慰幸。而第念金烏堂職。雖是平常之
時。年少之人。實有難堪。況今逆獄方張之
際。望七之老。擧行凡節。恐有不勝之慮。果
無生事之患耶。自聞此奇。寢食具不甘。或
中夜無悟之寤時思之。有時壓夢。然到此地
頭。聽天之外。無他道矣。西賊其間。已爲掃
蕩否。大軍所壓。不啻鳥卵之碎。而尙寂
淸盡之報。令人憤痛。此中
仲母氣力如前。各家姑免大段憂虞。海底侄
婦及得孫無恙。蟻谷姪婦乳����。幾至完合。
可幸。而但弟家憂患往復無常。畢境。則
復起難期。是可悶也。舍弟之所苦。近添於日氣
之不和。方在喘息度了中。明日
祀事。不復進參。益切追慕之情。況
兄主遠在千里之外。累歲不參。喪餘之哀。烏
得如是耶。鄕間人心之搔。尙未鎭壓。此何爻
像。蓋緣百年昇平之餘。始聞一隅儒林之
徒。胥動浮言。然亦是訛言不祥之兆。還切懼
懼之心矣。村中男昏女嫁。皆有定處。長生
定於鷹洞金進士家。以來十三日成禮爲計。
可幸。春陽叔主女昏。定於靑松南氏。德山定
於三峴。皆以十三已爲擇日。其餘皆不出來。
月內成禮。獨英文姑無定處。可悶。
兄主由還無路。弟兄相對未易。自度病勢
之外。或有意外之事。則未知更逢何日也。不覺
泫然之淚下。餘。病中艱書。伏祝千萬保
重。
壬申 二月 二十九日。舍季 性淳 上書。

興成隨價買送無妨。而有所
加給。何若是勤念也。穉謙
從作宰
出城云。可
幸。而但邑
薄。亦不
副渠之
所望。還
可笑嘆。
尙初爲
率來內
行。作下邑
之行。尙未
還歸耳。
海平消息。
姑未聞知。而
松山日前
亦往。其回
又聞解娩
之奇耶。不勝
鬱慮。海平
宅鳳臺
昏禮。亦在
十三日。昆州
內行已來。而
玄風河陽
內行。姑未
歸之耳。
免新之道。
必徵之於
三邑。速圖
之無妨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