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2월 29일, 李性淳이 바쁜 시기에 義禁府都事로 임명된 데 대해 걱정스런 마음을 전하고 여러 고향 소식들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2년(순조 12) 2월 29일에 李性淳(1757~1819)이 바쁜 시기에 義禁府都事로 임명된 데 대해 걱정스런 마음을 전하고 여러 고향 소식들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性淳은 李秉淳의 막내 동생이다. 먼저, 이달 22일에 李秉淳이 13일에 부친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그 후로 여러 날이 지났기에 궁금한 마음이 간절하다고 하였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仲兄[李民淳]에게서 直宿하고 있는 李秉淳이 평안하고 식사 등 모든 상황이 변함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義禁府의 직임은 평상시에 年少한 사람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逆獄이 전개되는 시기에 望七의 李秉淳이 감당하지 못할 우려가 있을까 염려된다고 하면서, 과연 탈이 생길 우려는 없는지 물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李秉淳은 당초 司饔院奉事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달 5일에 義禁府都事 呂東根과 서로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洪景來 세력이 그간에 이미 소탕되었는지 묻고, 아직까지 깨끗이 소탕되었다는 소식이 없어 분통하다고 하였다. 이어 집안 소식을 李秉淳에 전하였다. 仲母의 기력은 여전하시고 각 집안사람들이 큰 우환은 면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바래미의 姪婦 및 李秉淳의 순자가 무탈하고 蟻谷 姪婦의 乳����도 거의 완쾌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 집안의 우환은 수시로 생겼다가 없어지고 있다고 하면서, 걱정스런 마음을 표하였다. 자신의 병은 근래 불순한 날씨 탓에 심해져서 현재 喘息을 앓으며 보내고 있다고 하였으며, 내일 있을 祭祀에 다시 참석하지 못하니 추모의 정이 더욱 간절하다고 하였다. 더구나 李秉淳의 경우 먼 서울에 있어서 여러 해 동안 祭祀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애통한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李秉淳과 李性淳의 부친인 李龜朋이 3월 1일에 사망하여, 다음날에 그의 忌祭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의 儒林들이 浮言을 선동하여 고을의 인심이 진정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였다. 다음으로, 村中의 결혼 소식에 대해 전해 주었다. 끝으로, 李秉淳이 말미를 얻어 還鄕할 방도가 없어 형제가 만나기 쉽지 않다고 하면서 病勢 외에도 혹 뜻밖의 사고가 벌어지게 된다면 형제가 언제 다시 상봉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穉謙[李載延]이 수령이 되어 出城했다고 하니 다행스럽기는 하나 고을이 殘薄하여 그가 바라던 바와 부합하지 않으니 도리어 우습고 안타깝다고 하였으며, 그밖에 여러 주변 소식을 전해 주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李載延은 이달 19일에 新昌縣監으로 임명된 바 있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