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7월 25일, 李相雨가 안부를 교환하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2년(순조 12) 7월 25일에 李相雨가 안부를 교환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참고로 당시 李秉淳은 尙瑞院副直長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李秉淳이 서울로 가고 나서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고 하였다. 연전에 李秉淳이 방문하였으나 자신이 마침 출타하느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욱 그립다고 하였다. 李秉淳이 서울에서 몇 년 동안이나 벼슬살이하고 있으니 늘그막에 바쁜 공무를 감당하기 어려울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좋지 않은 여건의 衣食 생활로 건강을 상하기 쉽겠다고 하면서 걱정이 간절하다고 하였다. 가을 기운이 생겨나고 있는 이때에 근무하고 있는 李秉淳의 체후가 요사이 어떠한지 안부를 물었다. 李相雨 자신은 어버이의 숙환이 葬禮를 치르고 나서 늘 좋지 않아서 올봄과 여름 이래로 누차 허둥댔다가 서늘한 기운이 생기자 조금 병세가 덜해진 상황이라고 하였다. 또 叔嫂와 막내 누이가 모두 원인 모를 병을 얻어 三伏을 보냈다고 하면서, 올 한 해 약시중을 드는 일에 매몰되어 있다고 하였다. 끝으로 鄕解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에 서울로 갈지 확신할 수 없으니 李秉淳을 배알할 길이 없다고 하면서, 李秉淳이 내려올 날을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鄕草 1貼과 脯 5가닥을 증정한다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