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순조 11) 2월 7일에 鄭元善이 서울에 있는 여러 지인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1년(순조 11) 2월 7일에 鄭元善이 서울에 있는 여러 지인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咸鏡道에서 돌아오자마자 편지를 작성하여 胸褙와 함께 보냈음에도 아직 이병순으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혹 그것들이 중간에 유실된 것은 아닌지 한량없이 답답하다고 하였다.
이어 해가 바뀌어도 극심하게 추운 이때 서울에서 벼슬살이하고 있는 이병순의 건강 상태가 어떠한지 안부를 물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정원선은 咸鏡都事를 지낸 바 있으며 당시 이병순은 尙衣院僉正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來卿 兄(草庵 李泰淳)은 수령이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하였고, 景寬 兄(聾窩 李彦淳)은 계속해서 玉堂의 직함에 매여 있으니 아직 객관에 체류하고 있는지 물었고, 河陽에게서 계속적으로 소식을 받고 있는지 물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李泰淳은 梁山郡守로 임명되었고 李彦淳은 校理로 있었으며 당시 河陽縣監은 俗隱齋 李龜星이었다.
정원선 자신은 해가 바뀐 지금까지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楓嶽山에서 얻은 餘興이 아직 가시지 않아 늦봄이 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丹山으로 출발하고 싶다고 하면서, 이 생각이 이뤄진다면 이틀 밤이면 갈 수 있는 宜仁으로 고개를 넘어 가고도 싶으나 종놈과 말에 들어가는 노자와 먹이가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景寬 兄이 泮中에 확실히 있는지 모르는 관계로 따로 편지를 보내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러한 뜻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