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순조 11) 6월 18일에 李載延이 자신의 병세와 조정의 상황 등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1년(순조 11) 6월 18일에 李載延이 자신의 병세와 조정의 상황 등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載延은 본관이 延安, 자가 致謙으로, 生員試에 입격하고 縣監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의 부친은 李之受인데, 李之受는 李秉淳의 조부인 李世述의 첫째사위이다. 따라서 李秉淳에게 李之受는 고모부가 되고, 그의 아들 李載延은 고종사촌이 된다.
먼저, 10일에 李秉淳이 떠난다는 기별을 듣고서 直所에서 나와 곧장 泮村으로 들어갔더니 李秉淳이 이미 출발했다고 하면서, 서글피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 뒤로 다시 소식을 받을 길이 없었다고 하면서, 이런 무더위에 근무하고 있는 중의 건강 상태가 어떠하고 숲속의 모기로 인한 괴로움으로 건강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안부를 물었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李載延은 이 당시 尙瑞院副直長으로 근무하고 있고 李秉淳은 尙衣院僉正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李秉淳은 아마도 외지에서 근무하고 있던 상황으로 보인다.
李載延 자신은 몇 달 동안이나 계속되던 설사증이 갑자기 痢疾로 악화되어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였으며, 10일부터 지금까지 주야로 허둥거려 간혹 사람의 얼굴도 분간하지 못하는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하였다. 浮氣가 足部에서 胸腹部까지 퍼졌는데 곁에 救護해 주는 사람도 없이 다만 약의 힘으로 지금껏 지탱하고 있다고 하였다. 오로지 고향 생각밖에는 없으나 돌아갈 수도 없다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 愼吾의 病報가 누차 이르렀는데 그간에 위기에서 벗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李載延 자신의 병세가 회복될 가망이 전연 없는데 집안 소식까지 이러하니, 병은 악화되고 마음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都目政事는 吏曹判書가 나오지 않아서 언제 할지 모른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15일에 치러진 應製에서 金魯應의 아들(金道喜)이 급제하였다는 소식도 전하였다. 際可(俛齋 李秉運)는 현재 떠나지 않았으나 18일에는 반드시 하직 인사를 하고 출발할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李秉淳이 언제쯤 出直하는지 묻고 형제간에 먼 곳으로 나와 벼슬하면서 병이 나도 서로 부지해 주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