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순조 11) 7월 21일에 李載延이 都目政事 일정에 대해 알려 주고 말을 기일 전에 보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1년(순조 11) 7월 21일에 李載延이 都目政事 일정에 대해 알려 주고 말을 기일 전에 보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載延은 본관이 延安, 자가 致謙으로, 生員試에 입격하고 縣監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의 부친은 李之受인데, 李之受는 李秉淳의 조부인 李世述의 첫째사위이다. 따라서 李秉淳에게 李之受는 고모부가 되고, 그의 아들 李載延은 고종사촌이 된다.
李載延은 李秉淳이 더디게 승진하는 것은 都目政事가 지체되고 있는 것에도 문제가 있으나 오래 근무한 사람보다 나중에 들어온 자가 먼저 遷轉하는 데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다. 방금 단골리와 상의해 보니, 도목정사가 언제쯤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했다고 하였다.
또 李秉淳에게 말을 빌려 扈駕하는 것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서, 내달 12일에 元陵과 顯陵으로 陵幸하기로 결정되었으니 그전에 말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松峴의 終祥이 이달 24일에 있다고 하면서, 李秉淳이 下隷를 보내 조문하고자 하거든 내일이나 모레 전에 해야 主家 사람이 틈을 내어 답장할 수 있을 거라 하였다.
이어 乃城의 소식에 대해 전해 주었는데 과부가 된 며느리가 監營에 갔다고 하였으며, 올라온 殷叟가 헛수고를 면치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추신에서는, 땔감 한 바리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