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순조 11) 1월 27일에 李載延이 생일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조정 내외의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1년(순조 11) 1월 27일에 李載延이 생일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조정 내외의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載延은 본관이 延安, 자가 致謙으로, 生員試에 입격하고 縣監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의 부친은 李之受인데, 李之受는 李秉淳의 조부인 李世述의 첫째사위이다. 따라서 李秉淳에게 李之受는 고모부가 되고, 그의 아들 李載延은 고종사촌이 된다.
먼저, 객지에서 지내고 또 자신이 禁直하는 상황에서 변통할 방도가 없어 이달 그믐날을 함께 만나 보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李秉淳은 비록 상심하겠으나 자신들은 참으로 축하하면서도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아마도 1월 그믐이 李秉淳의 생일인 것으로 보인다.
李載延 자신은 병세가 오로지 차도가 없는데다가 궐내에 일이 많아 番直과 公故로 온종일 감독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하였다. 稱慶 陳賀가 내달 12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어저께 내일인 28일로 앞당겨 정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승정원일기』의 전후 일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이는 惠慶宮의 병환이 회복된 데 따른 것이었다. 李載延은 覆試 결과에 대한 기별이 海平에서 전해져 왔는데 이것이 어찌 헛소문이겠느냐고 하면서 매우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입궐하게 되면 榜目에 대해 탐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敬寬이 이미 사정을 진달하기는 하였으나 玉堂의 番次가 苟艱하여 며칠에 出直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서, 자신으로 하여금 대신 근심스럽게 한다고 하였다.
이어 봄 行幸과 科擧는 아직 그 吉日이 잡히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으며, 李 進士에게 말 값 1냥을 이미 받아 전해 주었다고 하였다. 또 崔氏 어르신의 부탁은 형편을 보아 들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6월에는 반드시 內職으로 옮길 것이니 그전에 도모해 달라고 하였다. 끝으로, 약간의 饍物을 올린다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