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순조 11) 7월 15일에 全熙龍이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1년(순조 11) 7월 15일에 全熙龍이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피봉의 내용으로 보면, 수신자인 李秉淳은 順陵參奉으로 재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李秉淳은 1809년(순조 9) 12월 7일에 順陵參奉으로 제수되었다. 또한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全熙龍은 1811년에 祭監 監察로 재직하고 있었다.
먼저, 그저께 밤에 宜寧의 上舍 李象奎(榜目에는 李祥奎로 기재되어 있음)가 秋到記講에서 居首를 차지했다고 하면서 좋은 광경을 보게 되었으나 李秉淳이 없어서 한층 섭섭한 마음이 간절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즈음에 李秉淳이 보내준 편지를 받아 보니 내용이 간절하고 字畫이 精細했다고 하면서, 보배로운 구슬을 받은 것 이상으로 欽歎했다고 하였다. 서늘해진 날씨에 參奉으로 재직하고 있는 李秉淳이 대체로 평안하게 지내고 있으나 腹部에 牽痛이 있음을 편지로 알게 되니, 위안이 됨과 동시에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全熙龍 자신은 객지에서 예전처럼 지내고 있으나 돌아가고픈 마음이 더욱 새롭게 들고 있다고 하였다. 吏曹의 堂上이 아직까지 肅拜하지 않고 있어서 大政이 시행될 기약이 없다고 하면서, 누가 陞遷될 수 있을지 현재로선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東都 李兄이 내일 출발하려고 하는데 함께 가지 못하기에 送別의 정을 억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 이와 관련하여 邸吏의 행태가 괘씸하다고도 하였다. 觀峴의 洪楚山(楚山府使 洪時溥)의 아들 洪永觀도 製第에 합격하였으니 한 번의 좋은 운수인 듯하지만 直赴하게 하라는 傳旨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惶蹙하다고 하였다. 끝으로, 李秉淳이 秋夕 전에 出直하지 못하면 그때의 답답한 마음을 장차 어찌 견디겠느냐고 하고 腹部 통증을 잘 다스려 保重하기를 기원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