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9월 27일, 李性淳이 여러 친지들의 근황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1년(순조 11) 9월 27일에 李性淳(1757~1819)이 여러 친지들의 근황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性淳은 李秉淳의 막내 동생이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당시 李秉淳은 尙衣院僉正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먼저, 뜻밖에 李秉淳이 보내준 편지를 받고서 서리 내리는 추운 날씨에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는 李秉淳이 평안하고 숙병도 악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위로되고 다행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고 하였다. 다만 말이 병들어 말미를 받아 돌아올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간절하다고 하였다. 仲母님께서 전에 비해 건강이 악화되지 않았고 仲兄[李民淳]도 평안하지만 자신의 숙병이 금년에 발작하여 숨을 헐떡이며 기침을 하고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李秉淳의 며느리는 아들을 얻고 나서 조금 살아가려는 의욕을 가지게 되었으나 病根이 깨끗하게 없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林皐 姪婦의 병은 소생할 가망이 있는 듯하나 元氣를 保할 방도가 없으니, 이것이 제일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막내 侄婦는 본래 약한 체질에 자주 출산하니 앞날이 걱정되는 마음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新浦의 從嫂는 월초에 또 사내아이를 출산하였는데 별도로 雜症이 없이 삼칠일이 다 되었으니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老壽 집안의 延禮가 하루 앞으로 다가 왔으니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英文의 婚處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로 올해가 다 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마도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듯하다고 하였다. 그 나머지 각 집안의 至親은 그다지 대단한 우환은 없으니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농사는 밭의 경우 비록 흉년은 면했으나 논은 작년만 못하다고 하면서, 여러 從班들 입장에서 극히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景寬[聾窩 李彦淳]이 玄風縣監에 제수되었으니, 조정에 公議가 있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一門에 세 명의 수령이 있어 장하기는 하나 도리어 두려운 마음이 간절하다고 하였다. 都會에 尙初는 新行으로 인해 응시하지 못하고 仲侄과 그 형은 가서 보게 되는데, 試官으로 華伯은 참여하지 않고 寧海 및 龍宮, 淸河 수령이 되었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穉兼[李載延]이 殿中監이 되었다고 하니 연말의 都目政事에서 수령이 되는 것은 우려할 것이 없을 듯하므로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細木 1疋을 보내니 北布로 바꿔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