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2월 12일, 李龜時가 고향 소식을 전해 주고 眞朱紅을 구할 수 있도록 부탁해 달라고 당부하기 위해 李秉淳에게 보낸 편지
1811년(순조 11) 2월 12일에 李龜時가 고향 소식을 전해 주고 眞朱紅을 구할 수 있도록 부탁해 달라고 당부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피봉의 내용으로 보건대, 당시 李秉淳은 順陵參奉으로 재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李秉淳은 1809년(순조 9) 12월 7일에 順陵參奉으로 임명되었다. 먼저, 중간에 인편이 있었으나 늘 출발하고 나서 인편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한 번도 안부편지를 보내지 못했기에 그지없이 서글펐다고 하였다. 이어 벼슬하는 나머지 頭風과 滯氣가 발작하지 않고 寢食 등 여건이 이곳에 있을 때와 같은지 물었다. 李秉淳의 며느리가 海里[바래미]에서 돌아왔는데 병이 없다고 하였으며, 마침 季應 戚을 만나서 李秉淳의 딸 母子가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였고, 그밖에 至親 집안이 각각 별탈이 없고 4명의 사위를 맞고 1명의 신부를 얻었는데 모두 기대에 흡족하다고 하면서, 주변 여러 사람들의 근황을 전해 주었다. 武夷 山訟에서 끝내 패소했다고 하면서 아주 분하다고 하였으며, 科擧 날짜를 듣게 되면 國輔와 같이 應試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泮村에 奇疾이 있는지 여부를 자세히 탐문하여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이의 婚事는 春夏 간으로 기약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특히 婚事에 필요한 도구를 마련하기 위해 致謙 戚[李載延]이 尙瑞院 관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하니 眞朱紅 2, 3丁을 사서 보내 달라고 대신 부탁해 달라고 하였다. 끝으로, 올해는 李秉淳이 華甲이니 모쪼록 말미를 받아 귀향하여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李秉淳의 며느리가 효성을 펼 수 있게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