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년(순조 10) 6월 15일에 金熙敎가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0년(순조 10) 6월 15일에 金熙敎가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熙敎는 본관이 義城으로, 一枝窩 金宅東의 아들이다. 그의 형인 海隱 金熙成의 딸 義城金氏가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과 혼인하였으므로, 그와 李秉淳은 戚分이 있다.
먼저, 李秉淳이 관직에 임명되어 서울로 간 지 벌써 반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편지하여 축하하지 못했으니 비록 궁벽한 산중에 살며 세상일에 應酬하려는 뜻이 없었기 때문이나 이것이 어찌 평소에 기약했던 것이겠느냐고 하면서, 부끄럽고 슬픈 마음을 표하였다. 李秉淳이 예전보다 평안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替番하여 서울로 들어가 날마다 親知들과 서로 어울려 얘기를 나눔으로써 나그네의 근심스런 회포를 잊을 수 있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집안에 主管할 사람이 없이 과부가 된 며느리가 외로이 기거하고 있는지라 李秉淳이 먼 곳에서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하였다. 金熙敎 자신은 초봄에 寃祥을 지내고 服制를 벗었다고 하면서 애통한 심정을 전하고, 정신과 형체가 날로 쇠약해져서 온갖 질병이 번갈아 생겨 스스로 悲憐한 가운데 여름에 큰조카가 전염병으로 셋째와 넷째 두 아들을 연이어 잃었다고 하였다. 상심이 깊은 늙은 제수씨가 본래 원기가 약한데다 건강이 손상될 우려가 많으니, 매우 우려스럽다고 하였다. 이외에 黃田의 상황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원근의 年輩들이 차례로 세상을 뜨고 있는데 닭실의 上舍 翁과 湖上의 寢郞 公 같은 분들이 일시에 돌아갔다고 하였다. 또 權汝厚(權載德)가 아들 하나를 잃은 일과 松山의 慘變은 또한 극히 참혹하다고 하였다. 順陵에 큰 공사가 있어 李秉淳이 승급할 기회가 있다는 소식을 전에 들었다고 하면서, 다시 들은 소식이 없는데 혹 공사가 정지되어 성사되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彛瑞(李龜星) 및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는 嶺南의 諸友가 모두 평안하게 지내고 있으며, 申庸晦가 수령에 제수되어 떠났는지도 물었다. 아울러 李秉淳이 還鄕할 시기가 언제 있을지 묻고, 병으로 궁벽한 산중에서 지내고 있는 자신이 만날 방도가 없기에 미리부터 서글프고 안타깝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뜸에 필요한 좋은 쑥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