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년(순조 10) 11월 22일에 李載延이 金 直長이 자리를 바꿀 수 있게 인사 담당 관원에게 청탁을 넣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말을 팔아 더 좋은 말을 사는 방안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10년(순조 10) 11월 22일에 李載延이 金 直長이 자리를 바꿀 수 있게 인사 담당 관원에게 청탁을 넣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말을 팔아 더 좋은 말을 사는 방안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載延은 본관이 延安, 자가 致謙으로, 生員試에 입격하고 縣監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의 부친은 李之受인데, 李之受는 李秉淳의 조부인 李世述의 첫째사위이다. 따라서 李秉淳에게 李之受는 고모부가 되고, 그의 아들 李載延은 고종사촌이 된다.
먼저, 李泰淳이 藥을 복용하고 神效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안정을 취하여 攝養의 유익함이 반드시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李載延 자신은 胸脇 부위에 痰이 맺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부득이 入番하여 모레 出直하게 되니 자신의 생활이 참으로 고생스럽다고 하였다. 金 直長이 비록 付祿되었으나 만약 그대로 獻陵에 있게 된다면 冬至祭로 受香하고 나가서 謝恩하지 못할 것이고 正朝에는 필시 落職할 것이니 매우 옹색한 형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본인이 말하기도 전에 어제 이미 銓家에 司圃署 등 부서의 직임과 바꿀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기는 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3, 400냥이 넘게 필요하니 어찌 용이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더구나 현직 銓官이 尤庵의 후손이니 반드시 바꿔 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어 李秉淳이 타는 말은 결코 한때나마 탈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성질이 매우 용렬하고 게을러 팔기도 어려우니 쓸데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李載延 자신이 바꿔주고 싶다고 하면서, 이 시기에 반짝 잘 먹여 끌고 온다면 마침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자에게 팔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30金을 받고 팔 수 있다면 좀 더 괜찮은 것을 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니 그에게 돌아올 여비와 2, 3일치 말을 먹일 거리, 三丁, 안마 등을 줘서 23일 안으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다. 粟藁 10여 束을 얻어 말 등에 실어 보내달라고 하였고, 안장은 泮主人에게 있으니 牌字를 만들어 보내면 수리해서 줄 것이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이틀이나 삼일이라 해도 말을 제대로 먹이는 것이 극히 어려우니 粟藁와 太斗를 변통해서 보내 달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