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순조 9) 3월 6일에 柳玄休(1752~1821)가 근황을 전하고 婚處와 관련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09년(순조 9) 3월 6일에 柳玄休(1752~1821)가 근황을 전하고 婚處와 관련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뜻밖에 심부름꾼이 와서 그를 통해 李秉淳가 보내준 편지를 받게 되니 깊이 위안이 되고 감사했다고 하였다. 다만 편지를 읽고서 숙환이 덜해져 가던 뒤에 또 外氣가 더쳐 여러 날 동안 증세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적지 않게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이어 며칠 사이 몸조리하고 있는 李秉淳의 체후가 다시 어떠한지, 仲氏와 季氏도 어떠한지 안부를 물었다. 柳玄休는 溫溪의 李氏에게 시집간 누님이 한을 품고 죽었고 東城의 姊兄도 사망하였으며 川城의 外叔母도 사망했다고 하였다. 또 딸이 세 아이를 데리고 예전처럼 지내고 있으며 아이들도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으나 앉은 자리가 따뜻하지 않아 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도리어 보지 않은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老의 婚處는 좋은 곳이 없지는 않으나 도로 상황이 무서워서 오랫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李秉淳의 편지 내용을 봤더니 자신의 생각과 매우 합치된다고 하면서, 만약 그쪽에서 의향이 있다면 가까운 곳을 버려두고 먼 곳을 선택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면서 속히 말을 전하여 完定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였다. 딸의 뜻도 마찬가지이므로 이에 알린다고 하였다. 규수를 비록 직접 보더라도 그 賢愚를 분변하기 어려운데 어찌 전하는 얘기만을 듣고 마음이 흔들릴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어 內行은 이달 22일로 날짜를 정해 보낼 계획이라고 하면서, 佳水川에 사람을 보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遠臺의 부음에 대해 놀라고 슬픈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李秉淳의 입장에서 심정이 어찌 편지에서 말한 바와 같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