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 8월 20일 李鋗이 지금 서울로 급히 상경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시월 초로 미룰 것임을 알리기 위해 崔湜에게 보낸 편지
1804년 8월 20일 李鋗이 지금 서울로 급히 상경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시월 초로 미룰 것임을 알리기 위해 崔湜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방의 안부를 알게 된 기쁨을 말하였고, 자신이 계획했던 서울 행차는 서울 소식을 듣게 됨에 허사가 되었음을 말했다. 到記(성균관 유생의 출석을 점검하여 과거 시험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일)가 이미 6일에 거행되어 자신이 닭 쫓던 개의 처지가 되었고 급히 서둘렀던 모든 일이 소용없어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시월 초에 상경할 것이고 그때 출발하기 전에 볼 것이라고 하였다.
추록으로 椒洞(조핏골)의 일은 기어코 出配되었다는 소식을 전했고 둘째 동생은 타지에 가서 돌아오지 않아 답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보내준 서찰과 事蹟草를 잘 받았음을 알렸다.
발신인인 이현(1758~1829)은 本이 碧珍이고, 字는 聖鎔, 號는 景玉齋이다. 父는 忠祿이며 漆谷 上枝(웃갓)에 거주했다. 彦英의 후손이며 金㙆의 문인이다. 1805년 증광시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고, 1807년 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典籍, 監察, 吏曹佐郞, 司諫院正言과 외직으로 成歡察訪, 陽智縣監 등을 역임했다.
수신인인 최식(1762~1807)은 본은 慶州이고 字는 淸彦이다. 初諱는 㵓이다. 號는 近齋이다. 품계가 通德郞이었다. 당시에 嶺下三傑(나머지 두 사람은 葛川 金熙周, 俛齋 李秉運)으로 불리웠다. 遺稿가 있다. 배는 立齋 鄭宗魯의 딸이다.
1차 작성자 :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