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년 11월 4일에 李錥이 형에게 主務官이 우선 아직 下倉하지 않았는데, 만약 들를 일이 있으면 부탁한 일을 힘쓰겠다고 하기 위해 쓴 편지
1803년 11월 4일에 李錥(1754~1819)이 형에게 主務官이 우선 아직 下倉하지 않았는데, 만약 들를 일이 있으면 여러 가지 부탁한 일을 힘쓰겠다고 하기 위해 쓴 편지이다.
편지의 서두에는 지난번에 여러 날 동안 회포를 풀었는데, 비록 평소의 친구 간에 있어서라도 오히려 헤어진 뒤의 서운함이 있는데, 하물며 형과 나의 사이에 있어서이겠냐고 하였다. 곧 뜻밖에 형의 편지가 먼저 와 종이 가득 정다운 말씀이 먼저 나의 마음을 알아주니, 감사하고 위로된다는 말을 전하였다.
자신은 예전처럼 곤궁하게 지내고 있다고 했고, 舍弟는 초2일에 서울 행차를 떠났는데 길은 멀고 추위가 심하니 절로 염려가 가득다고 하였다. 다만 혼례를 치른 것은 모든 것이 바라는 것보다 과했으니 다행이고 다행이라고 하였다.
편지에서 말씀하신 일은 비록 또 다른 가르침이 없더라도 또한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주무관이 우선 아직 하창하지 않았는데, 만약 들를 일이 있으면 여러 가지 부탁한 일을 마땅히 힘써 도모할 뿐이라고 하였다. 達成 행차는 언제 있는지 모르지만 만일 혹시 전에 기약한 서로 알던 방법을 비록 노복이 없더라도 어찌 감히 바꿀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어 이육은 곧 사형의 집에 초행을 무사히 끝내고 돌아왔다고 하니 축하할만하지만 편지를 가지고 온 노복이 재촉하기도 하고, 또 종이가 없어 안부를 빠뜨리니 이 뜻을 전해주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묻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이 간찰의 수신인은 피봉 부분에 살펴보면 ‘漆溪 靜案’이라고 하였는데, 대구 옻골에 있는 경주최씨 집안의 형인 듯하다. 발급인 이육은 자는 仲鍊, 호는 二可齋, 본관은 碧珍이다. 부친은 忠祿이며, 조부는 熙一이다. 대구 칠곡 上枝에 거주하였다. 李彦英의 후손이다. 1789년 增廣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1807년 別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유고가 전한다.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