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년(순조 3) 11월 29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자신의 근황과 科擧 設行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03년(순조 3) 11월 29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자신의 근황과 科擧 設行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熙成는 본관이 義城, 자가 誠之로, 一枝窩 金宅東의 아들이다. 文科에 급제하고, 持平에 제수된 바 있다. 그의 딸인 義城金氏가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와 혼인하였으므로, 그와 李秉淳는 서로 사돈지간이 된다. 먼저, 從姪을 통해 李秉淳의 편지를 받고 그 당시 李秉淳의 근황을 알게 되어 매우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어 다시 李秉淳의 안부를 묻고, 松山 친정에 갔던 안사돈(李秉淳의 부인인 善山金氏)을 이미 데리고 와서 적적함을 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자신의 딸인 義城金氏가 근래 병은 없는지 안부를 물었다. 金熙成 자신은 月初에 갑자기 사지에 浮氣가 생겨 보름 동안이나 온몸에 퍼지게 되니 浮腫이 의심되어 매우 위급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腹部로 퍼지지는 않고 점차 없어지다가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하였다. 星山에서 지은 약을 벌써 다 복용하였으나 원래의 증상에 조금도 변동이 없으니 약으로는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서 더는 약을 복용하지 않고 食補하여 조리할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빚진 약값이 산처럼 쌓여 가산이 탕진되고 걱정하면서 자신을 구호하고 있는 아이들의 상황이 매우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자신은 이달 7일에 持平에 首望으로 擬望되어 낙점을 받았는데 이는 곧 이조판서 徐邁修와 이조참판 金勉柱가 주관한 政事라고 하면서, 그들이 조사하여 擬望한 바가 매우 이상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보름 뒤에 자신이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즉시 遞差되었으니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또 貞純王后가 徽號를 극구 사양한 관계로 冬至 陳賀 뒤에 慶科를 설행하지 않게 되어 大庭試가 있을 듯 하다고 한다면서, 會試 날짜가 2월 22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면서 李秉淳의 科擧 준비 상황에 대해 물었다. 科擧를 보러 갈 때 탈 건강한 말이 부족하고 노자 마련도 용이하지 않을 것이니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끝으로, 李秉淳의 再從叔이 覆科를 보게 된 일에 대해서 이러한 시기에 특별한 일이라고 하면서 축하의 뜻을 전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