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순조 1) 1월 28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자신의 딸을 돌려보내는 문제 등과 관련하여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801년(순조 1) 1월 28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자신의 딸을 돌려보내는 문제 등과 관련하여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熙成은 본관이 義城, 자가 誠之로, 一枝窩 金宅東의 아들이다. 文科에 급제하고, 持平에 제수된 바 있다. 그의 딸인 義城金氏가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과 혼인하였으므로, 그와 李秉淳은 서로 사돈지간이 된다.
먼저, 午時에는 李秉淳의 조카를 만나고 저녁에는 李秉淳의 편지를 받으니 지극히 위안이 되었고 喪中에 있는 李秉淳이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金熙成 자신은 예전처럼 지내고 있으며 딸도 질병이 없다고 하였다. 父女가 서로 마주하여 때때로 그리운 마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때때로 서로 위로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金熙成의 사위이자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이 1798년(정조 22)에 1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이에 관한 언급으로 보인다. 내달 스무날쯤에는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으니 추후에 확실한 날짜를 정하여 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科擧를 보러 모두 출발한 뒤일 것이니 말이 없을 것이 염려된다고 하였다. 내달 초에는 科擧를 보러 출발할 것인데 먼 길에 제반 사항이 모두 여의치 못하다고 하면서, 李秉淳의 仲氏(李民淳) 및 여러 집안사람들도 이러한 문제를 면치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큰아들(金在仁)이 탈 말을 인근에 애타게 구하다가 근래 비로소 구입하였는데 가격은 비싸고 말은 형편없다고 하면서 李秉淳이 편지로 언급했던 두 곳의 말을 좀 더 일찍 알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浮浦의 寢郞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니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끝으로, 시국에 대한 소식을 대략 풍문으로 들었는데 과연 낭설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安邊수령이 당한 일이 크게 놀랍다고 하였다. 여기서 安邊수령은 壺谷 柳範休인데, 그는 이른바 仁同作變의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처벌된 張時昱의 딸 張南順을 비호해 줬다는 혐의로 咸鏡監司 李秉鼎에 의해 우선 파직되고 의금부로 잡혀오게 되었다. 柳範休의 사위 가운데 旅軒 張顯光의 冑孫인 張錫慶이 있는데 張南順과 張錫慶이 혈연적으로 서로 6촌간이므로, 柳範休가 張南順에 대해 일종의 편의를 봐줬던 것으로 이해된다. 추신에서는, 아들이 마침 외출하여 답장을 보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