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1월 4일, 李錥이 계정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까닭과 居昌族叔이 보낸 돈 18緡을 전하기 위하여 崔湜에게 보낸 편지
1800년 1월 4일에 李錥이 계정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까닭과 居昌族叔이 보낸 돈 18緡을 전하기 위하여 崔湜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 내용은 새해 인사로 시작되고 있다. 서로 소식이 막힌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또 해가 바뀌니 상대방이 생각난다고 하면서, 새해에 큰 복을 받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자신은 예전과 같은 모습이라 전할 만한 소식이 없지만, 집안의 우환이 그치지 않아 堂母의 상을 당했는데, 뜻 밖에 당한 변고이기 때문에 成服도 잘 행하지 못하여 더욱 슬프다고 하였다. 근래 있었던 溪亭의 모임은 마침 제사를 만나서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를 써 두고서 稚器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결국 부치지 못하여 유감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居昌族叔이 보낸 돈 18민緡은 壻君을 통해 부치고자 했지만, 서로 만나지 못하여 전담 하인을 통해 돈을 보내니 헤아려 받아달라고 하였다. 끝으로 만나서 이야기할 기약이 없는 것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전하며 편지를 마쳤다.
발급인인 李錥(1754~1819)은 본관은 碧珍, 자는 仲鍊, 호는 二可齋, 부친은 李忠祿, 조부는 李熙一이다. 漆谷 上枝에 거주하였으며, 李彦英의 후손이다. 1789년 증광시 3등으로 생원에 입격하고, 180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편지의 피봉을 보면 ‘淸彦兄’과 ‘崔生員’이라고 써져 있는데, 淸彦은 百弗庵 崔興遠의 손자인 崔湜(1762~1807)의 字이다. 최식은 본관은 경주, 초휘는 㵓, 호는 近齋, 부친은 崔周鎭, 配는 晉陽鄭氏이며, 품계가 通德郞에 올랐다.
편지 내용 중에서 ‘壻君’은 남의 사위를 높여 부르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상대방의 사위이자 자신의 아들인 愚石 崔鳳述(1784~1838)을 가리킨다. 따라서 발급인 이육과 수취인 최식은 서로 혼인관계를 맺은 사돈 사이임을 알 수 있다.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