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정조 23) 7월 16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근황을 묻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1799년(정조 23) 7월 16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근황을 묻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熙成는 본관이 義城, 자가 誠之로, 一枝窩 金宅東의 아들이다. 文科에 급제하고, 持平에 제수된 바 있다. 그의 딸인 義城金氏가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와 혼인하였으므로, 그와 李秉淳는 서로 사돈지간이 된다. 먼저, 李秉淳가 보내준 편지를 받고서 조섭하고 계시는 重闈(부모와 조부모)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지 않았고 어른들을 모시고 있는 李秉淳 형제가 다시 평안해졌음을 알게 되니 매우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다만 이러한 때에 喪中의 애통한 심정을 더욱 감당할 길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金熙成의 사위이자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의 사망과 관련된 언급으로 보인다. 金熙成 자신은 늦더위로 인해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하였고 늙은 마누라도 안면 마비 증세가 비록 나아가고는 있으나 아직 완쾌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仲子는 더위가 두려워 우선 그 처가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먼저 돌아온 庶弟를 통하여 初終 뒤의 광경을 듣고서 이미 비통하였는데 返櫬의 절차에 대해 한층 신경이 쓰인다고 하였다. 李秉淳가 근래 金谷에 조문하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늦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은 이때에 혹시라도 건강이 악화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끝으로 자신의 딸(李秉淳의 며느리인 義城金氏)이 眼眚을 앓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근래 유행하는 병증인 듯하다고 하면서, 李秉淳가 더욱 난감할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