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정조 4) 3월 17일에 醴泉郡에 있는 玉川齋에서 회의를 열어 命山에 祠宇를 건립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通文
1780년(정조 4) 3월 17일에 醴泉郡에 있는 玉川齋에서 회의를 열어 命山에 祠宇를 건립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通文이다. 이 사우는 齊平公 權先生, 承旨 權先生, 司成 金先生, 奉事 權先生를 배향하기 위한 것이다.
본 통문에 의하면, 명산에 사우를 지으려고 시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669년(현종 10)에 葛川 金參判公과 蘆洲 金司諫公이 일을 주관하고, 進士 權月梧公이 山長을 맡아 재력을 모아 廟宇와 齋室를 지으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해 닥친 흉년 때문에 중간에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후 병술년(1706년 또는 1766년)에는 그 뜻을 이어받으려는 논의가 있어서, 府使 丁公과 佐郞 權公이 사업을 시작하여 參奉 張公이 터를 닦고 祝辭를 하기까지 했지만, 그 공사를 이루어지지 못한 바 있다.
통문에서는 이러한 내력을 언급하고, 이금 다섯 선생을 배향하려는 것은 후생들이 참람되게 闡揚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당시 고을에서 논의한 문서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지만, 渚谷 권씨 문중에 부조를 요청하는 통문과 임원의 성함이 남아 있다고 하면서[‘1669년 명산서당(命山書堂) 부조(扶助) 요청 통문(通文)’ 참조], 통문과 함께 이 당시의 日記를 등서하여 보내니, 정해진 논의에 따라주길 바란다고 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