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8년 4월 16일, 鄭燁이 喪을 당한 가운데 슬픔을 표현하고 상대의 상에 위로하기 위하여 崔生員에게 보내는 편지
1758년 4월 16일에 鄭燁이 喪을 당한 가운데 슬픔을 표현하고 상대의 상에 위로하기 위하여 崔生員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처음, 월초에 받은 상대의 위로 편지로 매우 위로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였다. 그간 자신은 슬픈 마음에 삶의 의욕도 없는데다가 답장을 쓸 상황도 못되어 편지가 늦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상대측에서 당한 寃喪에 대해 상대의 어머니와 상대의 안부를 묻고는 목이 메도록 슬픈 마음과 그리운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은 여러 가지 주변 상황들에 구애되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알리면서, 죽은 이가 생전 병이 들었을 적에도 가보지 못하고, 죽어서 매장할 때도 갈 수 없음에, 아버지 된 자의 슬픔을 다시 한 번 새기고 있다.
발급자인 정엽은 본관은 迎日, 자는 汝章, 호는 式好窩이며 생몰년은 미상이다. 경주에 살았고, 鄭克後의 5세손이다. 동생 梅軒 鄭煜(1708~?)과 우애가 매우 독실하였다고 한다. 壽職으로 副護軍을 제수 받은 이력이 있다. 大山 李象靖이 기록한 그의 묘갈명에는 "霞溪(경주 霞谷)에 禮를 좋아하는 군자가 있었다." 라고 는 기록이 있다.
수취인은 피봉에 기록된 "崔生員僉座前"을 통해 생원 이력이 있는 경주 최씨 인물의 형제들로 파악된다. 편지의 발급연도인 무인년의 경우, 정엽의 동생 정욱의 생년과 雲西 鄭夏濬(1737∼1806)의 문집에, "역병을 피하여 霞谷에 가서는 식호와 정엽, 매헌 정욱 등과 더불어 예법을 토론했다." 라는 내용을 통해 1758년으로 유추하였다. 百弗庵 崔興遠의 아우인 崔興厚의 배위가 烏川鄭氏[영일정씨]인데, 그가 정엽의 딸이다. 결국 이 편지에서 상대측에서 난 원상은 최흥후의 아내이자 정엽의 딸의 죽음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본문에 정엽 스스로 ‘상대측 매장에 자신이 가보지 못하여 아비 된 심정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더욱 신빙성 있는 정보로,『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에는 최흥후의 배위 오천 정씨의 몰년이 1758년 2월 17일로 기록되어있다. 이를 통해 수취인은 최흥후의 형제들로 파악된다.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