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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3년 최흥원(崔興原) 외 2인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753.2714-20150630.K27140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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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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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최흥원, 최흥점, 최흥건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작성시기 1753
형태사항 크기: 31.5 X 44.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53년 최흥원(崔興原) 외 2인 서간(書簡)
1753년 9월 16일에 최흥원(1705∼1786) 외 2인이 근황과 안부를 전하고 상대가 써 준 기문(記文)의 검토 및 고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 묻기 위해 쓴 편지이다. 저자는 상대가 병든 상황에 공무를 보며 고생하고 있는 점을 걱정하였다. 또한 상대가 써 준 기문에 관해 교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 외에도 수령이 아전을 벌 준 일, 상대가 보내준 소금을 잘 받은 점 등에 대해서도 알렸다.
1차 작성자 : 김동현

상세정보

1753년 9월 16일, 崔興遠 외 2인이 근황과 안부를 전하고 상대가 써 준 記文의 검토 및 고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 묻기 위해 쓴 편지
1753년 9월 16일에 崔興遠(1705∼1786) 외 2인이 근황과 안부를 전하고 상대가 써 준 記文의 검토 및 고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 묻기 위해 쓴 편지이다.
처음 상대와 일전에 만난 이야기를 언급하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특히 상대가 병든 상황에 공무를 보며 고생하고 있는 점을 걱정하였다. 본론으로 일전에 상대에게 부탁하여 받은 집안 齋堂의 기문에 관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아울러 교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永川沙橋로 추정되는 곳에 사는 최씨 일족들에게도 이 기문을 전해주어 논의하겠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海邑의 수령이 해당 관아의 色吏를 벌 준 일에 대해 언급하였다. 추록에는 상대가 보내준 소금을 잘 받았다고 하였다.
발급인인 최흥원은 본관은 경주, 자는 太初 · 汝浩, 호는 百弗庵이다. 본 문서에 저자의 성명을 ‘崔興原’으로 표기하였는데, 나중에 ‘崔興遠’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교관이 된 이후 장악원주부, 世子翊衛司左翊贊 등을 역임하였다. 夫仁洞規를 세워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았고, 先公庫 · 恤貧庫 등을 만들어 고을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사후 효행으로 정려되고, 승지에 추증되었다. 수취인은 피봉이 누락된 관계로 확실히 파악할 수 없고, 본문에 최흥원이 상대에 대해 ‘제(弟)’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면 동년배 정도의 친우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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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3년 최흥원(崔興原) 외 2인 서간(書簡)

日前
屈駕僻陋。一枕穩話。可見故人之情。而適値病中
行事之餘。神思昏頹。未能盡所欲道。別後却增
悵失。迨猶不已。忽接
惠書。書首所諭。正獲我心。尤可喜可喜。仍審秋凉
視篆學候保吉。惟以民役里撓。無以寬緩爲恥。此
足見愛民惻怛之發。則民庶幾得實惠有日矣。然
若專於應物做事。則恐英銳過而涵養之功損。是
可戒也。且看筆字。不無紛忙氣態。豈役於簿書
應接者耶。大病餘未盡完復。前後勞惱。每
如此。則受添亦可慮。幷須加愼千萬。興原等。頃添
之證。至今往復。頰核不解。痛眩相仍。一切爲病。母之
憂深甚。悶煎之私。不可形言。惟以諸房姑無大段憂厄。
爲幸耳。齋記撓忽中。果致思搆成。因便投惠。
不待委進更乞。不棄厚意。倍極銘感。奉讀再三。
而知其命意立議之固好。齋堂自此可以生顔色
而傳百世矣。然病甚昏眩兼拘痘。不卽取見。未及
詳究。從當十復讀玩。如有可商量處。其可隱耶。
沙橋亦當送示。若有論說。亦可告也。聞來使
所傳。則領物色吏受罪于營門。未知緣何。曾聞

進上海邑太守。欲明正束吏。則奸猾或不
無乘時奸弄。故致生事。此亦可寒處也。如
何如何。歸使暮到特促。强病僅呼。萬未一
究。伏惟
恕察。謹拜復。
癸酉 菊月 旣望。弟 崔興原 興漸 興建 狀上。

荷鹽謹受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