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8년 5월 9일 崔興源은 집안의 사정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공부 할 것을 李宜翰에게 전하는 편지
1748년 5월 9일 崔興源(1705~1786)은 집안의 사정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공부 할 것을 李宜翰에게 전하는 편지이다.
智竗에서 작년 11월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先大夫께서 추증이 되었고, 상대방의 병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자신은 집안의 크고 작은 근심으로 人事를 빠트렸다고 하였다. 이의한에게 공부의 깊이는 얼마나 향상 되었고, 內外와 輕重을 分別한 것이 얼마나 되냐고 하였다. 또 학식이 넓은 것은 알지만 진취적으로 공부를 하여 핵심을 얻는다면 후배들이 보고 느낄 것이라 하였다.
최흥원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배움의 길을 놓쳤고, 작년부터 어머니의 병과 자신의 병도 심해져 의학 서적만 본다고 하였다. 進叔 崔興漸(1709~1771)은 작년 병중에 마마를 겪어 얼굴이 변하고 남은 고통도 심하다고 하였다. 立夫 崔興建(1712~1769)은 지난겨울 질병으로 거의 반년을 누워 있다고 하였다. 鶴洞丈이 방문하여 가난에 찌들고,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는 자식을 위해 의원과 약재를 구한다고 분주하였다. 蒼水의 나이든 벗이 다녀갔는데 착한 사람이 곤액을 당하는 것이 심하다고 하였다. 霽翁丈의 일은 차마 말을 할 수 없다며 伯子는 슬픔이 지나쳐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從姉의 죽은 날이 다가와 가고자 하지만 병으로 가지 못한다고 편지를 마쳤다.
최흥원이 편지에서 말한 제옹장의 이야기는 金聖鐸(1684~1747)의 일이다. 1737년 김성탁은 스승 李玄逸(1627∼1704)의 누명을 구명하기 위해 伸寃疏를 올렸다. 하지만 왕의 노여움을 사 旌義에 유배 되고 그 뒤 光陽으로 이배되어 죽었다. 그의 아들 伯子 金樂行(1708~1766)은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 아버지가 죽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병을 얻었다고 한다. 편지의 내용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발신자는 崔興遠으로 본관은 慶州이고, 자 太初 · 汝浩, 호 百弗庵이다. 편지에 적힌 崔興源은 자신의 초명을 적은 것이다. 그는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 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주부 · 공조좌랑을 거쳐 1784년 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되었다. 죽은 뒤 1789년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고, 이듬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 8권 7책이 있다.
『백불암집』書에는 「答李季白(宜翰, 戊辰)」이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이 편지와 내용이 일치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수신자는 李宜翰이고 자가 季白인 인물로 볼 수 있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다.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