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영조 3) 2월 25일에 江左 權萬(1688~1749)이 자신의 分館 등과 관련하여 水月軒 李集(1672~1747)에게 보낸 편지
1727년(영조 3) 2월 25일에 江左 權萬(1688~1749)이 자신의 分館 등과 관련하여 水月軒 李集(1672~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앞부분이 결실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의 말미에 ‘渾衙’라는 말이 쓰인 것으로 보아 수신인이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사람일 것으로 보이는데, 시기적으로 수취인은 隱拙齋 李守弘의 생부인 水月軒 李集으로 짐작된다. 李集은 당시 三嘉縣監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먼저, 자신의 마을에 痘火가 한창 치성하여 一家에 또 慘喪(부모보다 자손이 먼저 죽은 상사)이 발생하니 참혹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三從兄이 또한 모친상을 당하니 구십 노친을 모시고 있는 상황에서 심경이 참혹하다고 하였다. 分館에 관한 일은 그저께 蔚山府使(李萬維)의 얘기를 들었더니 老論에서 세 명의 文官이 현재 나왔고 아직까지는 이미 完圈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고 하였다. 回刺紙는 丹倅(丹陽郡守)와 연락하여 조만간 신경을 좀 써 달라고 당부하였다. 科擧에서는 禮安의 사람들이 모두 落榜하고 乃城(奉化)에서는 오직 琴命周 한 사람만이 합격했다고 하면서, 성과 면에서 전에 없던 변고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자신의 아들이 현재 닭실에 들어가 머물고 있는데 우선 질병에 걸리지는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끝으로, 여행을 한 뒤에 여독이 자못 심하여 자신의 회포를 다하지 못하고 이만 줄인다고 하였다.
李集(1672~1747)은 본관이 眞城, 자가 伯生이다.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柳厚章·成文夏 등에게서 성리학을 배웠고, 權斗寅·權斗經 등과 함께 道學을 강마하였다. 1728년(영조 4) 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陶山書院에서 義兵을 일으키고 군량을 모집하였고, 난이 평정된 뒤 조정에서 상으로 관작을 주고자 하였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문집이 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