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8년(숙종 4) 12월 24일에 李緯漢이 始祖의 誌石과 背叛 奴婢 등에 관한 일로 李英哲(1607~1681)에게 보낸 편지
1678년(숙종 4) 12월 24일에 李緯漢이 始祖의 誌石과 背叛 奴婢 등에 관한 일로 李英哲(1607~1681)에게 보낸 편지이다.
피봉의 내용으로 보건대, 李英哲이 敎官에 제수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는 1666년(현종 7)에 童蒙敎官으로 제수되었다. 먼저, 始祖의 誌石에 대한 일은 방금 眞寶의 通文을 보았더니 아마도 받아낼 길이 있을 듯하니 더없이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그러나 門中의 변고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 通文이 이미 貴處에 도착하였는지 물었다.
또 듣기로 자손들이 함께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비하는 자가 또한 많다고 하니, 지금 門中의 행태를 보건대 어찌 남들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면서 李緯漢은 李英哲이 이러한 뜻으로 門親을 勸起하여 수일 내로 빠짐없이 가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미상인데, 아무튼 李緯漢 자신도 어버이의 병환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 入去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때에 巡行하는 觀察使가 貴縣에 도착할 것이니 呈文하는 일의 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데 李英哲이 혹 심상하게 여길 것이 염려된다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아들 李在柱의 奴婢에 대한 일은 그놈들이 投托하고 배반한 실상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庫有司 및 首奴 春石 등이 奴婢들에게 뇌물을 많이 받고 이러한 가당치도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어찌 陶山書院에서 이러한 일이 생길 줄 생각이나 했겠느냐고 하였다. 이 奴婢들의 신원에 대해서 李英哲이 훤히 알고 있는데 어째서 진즉에 새로운 奴婢案에 頉減하지 않고 지금까지 그 이름을 남겨 두어 뒷날의 시끄러운 사단을 야기했느냐고 책망하였다.
아울러 春石과 戍汗 등을 엄하게 다스리고 싶은데 安東府使의 題辭에 의거하여 이를 粘連하여 禮安에 呈訴하니 禮安縣監의 題辭가 또 괴이했다고 하면서, 이는 필시 春石 등이 誣訴해서 그럴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歲初에 친히 만날 것이니 그때 다 얘기하겠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李 察訪(李希哲인 듯함)에게는 겨를이 없어 편지하지 못했으니 이 편지를 함께 봐달라고 하였고, 黃 郞이 三嘉縣令을 만나 보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入去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李英哲(1607~1681)은 본관이 眞城, 자가 明叔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손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관직에 천거를 받아 敎官에 제수되었다. 隱拙齋 李守弘의 조부가 된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