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年 5월 12일, 愚軒 金養鎭이 여러 근황을 전하고 말을 빌려 달라고 청하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丙年 5월 12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여러 근황을 전하고 말을 빌려 달라고 청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중석은 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 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은 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몇 달 동안이나 만나지 못해서 이미 그리운데 이전에 인편이 있어도 편지하지 못했고 이중석이 편지해 주었어도 답장하지 못했으니 비록 일 때문에 바깥에 있었더라도 안타까운 마음이 깊었다고 하였다. 旱災와 風災가 발생하고 있는 이때에 査夫人과 이중석 형제, 자신의 딸 母女, 堂內 여러 사람들이 모두 평안하고 無病한지 안부를 물었다. 또 新岩이 한결같이 지내고 있고 요사이 혹 고향으로 와서 머물고 있는지 물었다.
김양진 자신은 2월 보름쯤부터 先齋에 가 머물다가 달포 전에야 비로소 일을 끝마쳤고 돌아온 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또 石亭의 모임에 가서 열흘을 보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전에 집으로 돌아와 피곤함이 심하여 자리에 쓰러졌다고 하면서 많은 기력을 잃었다고 하였다. 또 공부도 다시 중단하였으니 매우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다만 형님이 예전처럼 평안하시고 각 식구들이 별탈없이 지내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지난번 행차에서 豊山으로 가서 이중석이 달포 전에 龍宮으로 가 歷訪하고 弔問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소년의 행동은 소홀하기 십상인데 지금 도리어 이와 같이 이중석이 주도면밀하니 참으로 듣기 좋았다고 하였다. 작황은 보리농사가 이미 흉년인데 추수도 글렀다고 하였다. 水田은 균열이 가고 고지대도 메말랐으니 날마다 人情이 들끓고 있다고 하였다. 풍년이 들어도 넉넉하지 않은 이중석 집안의 사정으로 봄과 여름을 어떻게 버티겠으며 앞으로 어떻게 대책을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또 이중석이 몇 군데에서 推尋하는 일을 모두 끝마쳤는지 묻고, 민간에 원성이 생기지 않게 처리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아들이 滯症이 없어지지 않아 椒水를 마시러 가려고 하는데 이중석과 함께 가고자 하니 旬望에 틈이 생기면 함께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다. 朴谷과 新昌의 葬禮가 20일 쯤에 蔚嶺 근처에서 치러지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타고 갈 말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을 상세히 언급하고 이중석의 말을 이달 안으로 끌고 오면 잘 먹여서 다시 돌아온 뒤에 즉시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애로가 없으면 이번 편에 보내 달라고도 하였다. 끝으로 婚處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결론적으로는 婚談을 중단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고 하였다.
이중석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이병순의 증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